예문관(藝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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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의 교서를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서.

개설

조선전기에는 고려 말기의 제도를 수용하여 예문춘추관에서 교명과 국사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1401년(태종 1)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이 혁파된 뒤, 집현전에서 수행하던 인재 양성과 학술적인 기능을 일부 대행하도록 하였다. 1462년(세조 8) 겸예문관직(兼藝文館職)의 설치는 이러한 일을 수행할 목적으로,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470년(성종 1) 이전의 집현전 직제 중 정3품 부제학에서 종6품 부수찬에 이르는 관직이 증설되면서, 과거 집현전과 예문관의 복합적인 기관으로 변하였다. 1478년(성종 9) 2월 집현전의 정7품 박사에서 정9품 정자에 이르는 관직이 마련되어 집현전과 예문관의 완전한 복합체가 되었다. 이로 인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1478년 3월 예문관에 중첩 설치되었던 집현전의 옛 직제는 홍문관으로 이관되고 예문관은 종래의 기능을 수행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2년(태조 1) 7월 건국 직후에 직제를 반포한 교서에서 ‘교명과 국사를 논의하는 일을 맡은 관서’로 예문춘추관제가 발표되었다. 예문춘추관은 왕의 명령을 짓는 일과 국사를 논의하는 두 가지 다른 기능뿐만 아니라 직제도 예문관과 춘추관이 혼성된 것이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01년 7월의 관제 개혁에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다시 분리되었고, 예문관은 녹관(祿官) 즉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녹봉을 받던 벼슬아치로, 춘추관은 겸관(兼官)으로 충원하였다. 직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춘추관에는 영춘추관사 1명, 지춘추관사 1명, 동지춘추관사 2명, 편수관·기주관·기사관을 두었고, 기사관은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등이 수행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한편 1393년 9월 14일 경·외 모든 아문에서 중요한 자료를 춘추관에 보고하도록 법제화하였고, 이는 『원육전(元六典)』의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왕이 정무를 집행할 때에 그와 관련된 내용 가운데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를 사관이 추려 적은 시정기(時政記)의 기록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확대되어 확정된 시기는 1434년(세종 16)으로, 시정기의 구체적 내용이 왕의 재가를 받아 법제화되면서부터이다. 예문관 역시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일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경·외의 대소 관서로 하여금 시행하는 일을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내도록 하였는데 사헌부·의금부·예조의 기록은 부실하고 각 관청은 보내지 않으니 이를 시행토록 할 것. ②이조·병조·예조·경연·사헌부·승문원 등에도 기록을 담당하는 일을 낭청 1명에게 겸임하게 할 것. ③예문관 직제학의 감독 아래 직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 아문의 문서를 연월의 순서대로 정리하여 시정기를 만들 것. ④대간의 상소와 신하들의 상서로 아뢴 일을 기사관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바치게 할 것. ⑤외국에 사신으로 나간 사람은 국가와 군민에 관계되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서장관이 기록하는 예에 따라 상세히 기록하여 바칠 것. ⑥사관은 견문한 바를 기록하여 간직하였다가 바칠 것. ⑦시정기는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비치하여 두고 정해진 해에 포쇄(曝曬) 즉 젖거나 습기 찬 것을 바람에 쏘이고 햇볕에 말리게 할 것.

조직 및 담당 직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르면 예문관은 정1품 영사 1명, 정2품 대제학 1명, 종2품 제학 1명, 정3품 직제학 1명, 홍문관직제학과 교리 중에서 겸임한 정4품 응교 1명, 봉정7품 봉교 2명, 정8품 대교 2명, 정9품 검열 4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제학 이상은 겸관이며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하고 응교는 홍문관의 관원이 겸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예문관의 전임관은 봉교 이하가 되었다. 대제학은 나라의 문한을 주관하며 문형(文衡)이라고도 하였다.

봉교 이하는 한림이라고도 하였는데,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였다. 이들은 사관으로서 시정기·사초(史草) 등을 작성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봉교 이하를 처음 임명할 때에는 의정부에서 이조·홍문관·춘추관·예문관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좌전(左傳)』 및 제사(諸史) 중에서 강(講)하게 하여 합격한 자에 한해 서용하도록 했으며, 후보자를 전임 한림이 추천하도록 했다.

1388년(고려 창왕 1) 예문관원이 사관을 겸한 것은 최견이 왕에게 올린 다음과 같은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①사한지직을 맡은 문행자 8명이 임명되어 역사의 기록과 왕의 글을 짓는 일을 함께 맡았다. ②이들을 지휘하는 겸관을 두었다. ③근년에 이르러 사관과 한림원의 기능이 둘로 나뉘어 겸관은 임무를 담당하지 않고, 단지 공봉 이하 8명 중 4명만이 사초를 작성하였다. ④앞으로는 사한 8명이 모두 각각 사초를 만들게 할 것과 겸관 중 충수찬 이하에게 견문에 의거한 사초를 써서 사관에 남기도록 하였다.

최견의 상서문 이후 사관과 한림원이 분기되었지만, 두 기관은 고려전기부터 이미 뉘어 있었다. 고려 말기 예문관과 춘추관이 분리되어 있을 때나 합쳐 있을 때에 두 기관에는 직명을 같이하는 공봉 1명·수찬 1명·검열 4명이 있었으며, 두 관서가 통합된 1308년(고려 충렬왕 34) 이전에는 직한림원 4명·직사관 4명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한직 8명의 상급자로 설치된 겸관은 춘추관의 충수찬관·충편수관·겸편수관직으로서 3품직 이하의 문한직 관료가 겸해 왔다. 1388년부터 사한의 8명이 사관직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392년 예문관과 춘추관의 관리가 혼성된 예문춘추관 직제에서도 공봉관 2명·수찬관 2명·직관 4명의 8명이 전임 사관으로서 사초 작정의 임무를 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겸관 충수찬관 이하의 겸관에게 사초를 작성하여 납부케 하였던 것이다. 이후 1401년 관제 개혁에서 춘추관의 전임직이 없어지고 예문관 봉교 이하 8명이 겸직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관의 겸직은 고려시대처럼 인물을 선정하여 겸직시키지 않고 본직에 따라 당연히 겸직되는 성향이 강화되었음이 확인된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는 영사를 영의정이 겸하도록 고쳤고,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직제학을 없앴다.

변천

조선의 춘추관은 고려의 사관(史館)을 계승하였다. 광종 때에 설치된 사관은 충선왕 때에 춘추관으로 개칭되었고, 예문관과 합쳐져 예문춘추관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두 기관의 통합과 개칭은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상황에서 원나라의 통치기구와 같은 명칭의 관청을 고려에 둘 수 없다는 원나라 측의 압력에 의해서였다. 또한 중앙행정 관서의 축소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이와 더불어 예문관의 전신인 한림원과 춘추관의 전신인 사관이 궁중 안에 설치되어 문한을 담당한 기구로서의 유사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사관의 일과 한림원의 일이 별도로 처리되었던 관행에 따라 1325년(고려 충숙왕 12)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반원정책이 추진되어 원나라 간섭 이전의 구제로 명칭이 환원됨에 따라 춘추관은 다시 사관으로 개칭되었다가 반원정책이 포기된 1362년(고려 공민왕 11) 춘추관으로 개칭되었고, 1375년(고려 우왕 1) 예문춘추관으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직제는 조선 건국 직후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대전통편』에는 의정(議政)이 겸임하던 영사를 영의정이 겸임하도록 했으며, 『대전회통』에서 직제학이 없어졌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경연청에 합쳐졌다.

의의

예문춘추관의 기본적인 기능은 당시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특히 예문관의 전임관인 사관들은 왕의 언행을 기록하기 위하여 정사가 벌어지는 모든 자리에 입시하고 왕의 행차에 수행하여 기록을 남겼으며, 이를 사초로 정리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두 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다른 한 부는 집에 보관하였다.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 하였다. 가장사초를 만들게 한 이유는 사초의 정리가 미비할 때를 대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수관 이상의 사관은 견문에 의한 사초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들 사초는 후일 실록을 편찬할 때에 사초의 제출 명령이 내려질 때 춘추관에 제출하게 되었다. 당시의 기록을 정확하게 남기기 위해서 각 관서의 중요 문서를 연말에 제출받아 전임 사관들이 수찬관이나 편수관의 주도 아래 연월일순으로 기사를 정리하는 자료를 만들었는데, 이를 ‘시정기’라 하였다. 이런 시정기는 송나라의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고려 이래 ‘일록’ 또는 ‘일력’을 만들던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예문관의 제학 이상은 다른 관서의 관원이 겸임했으며, 대제학이 문한을 맡아보았다. 봉교 이하의 관원을 처음 제수할 때는 의정부가 이조·홍문관·춘추관·예문관과 함께 『자치통감』·『좌전』 등 중국의 여러 사서 가운데 강하게 해서 합격된 자를 채용했다. 1년에 양도목(兩都目)으로 해서 2명씩 거관(去官)시켰다. 품계가 낮은 자는 그 직위에 준하여 품계를 올려 주고 차례차례 전임시켰다.

원래 예문관 직제학과 직관 2명은 별다른 업무가 없으므로 사관이 겸직하여 매일 출근하게 했다. 또 각 아문에서 예문관에 제공·보고한 문서를 점검하고, 예악형정에 관계되는 현행 사무로서 관계되는 것을 실수 없이 기록하여 춘추관에서 해마다 수찬한 것을 시정기라고 이름 붙인 뒤 실록 편찬의 자료로 삼게 했다.

이후 예문관 전임 관원인 봉교 이하는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게 했다. 그리하여 예문관의 전임관 8명인 봉교·대교·검열을 모두 합쳐 한림이라고 했으며, 예문관에서 관외로부터 실록 편찬 자료를 운반해 오는 데 사용하는 궤(櫃)를 한림궤(翰林櫃)라고 했다. 사고에 보관된 실록이나 사초의 포쇄를 위해 예문관원이나 홍문관원에서 포쇄관을 차출하는 것이 상례였다. 예문관도 홍문관처럼 관원을 뽑기 위한 예문록이 있어 권점이 3개 이상인 자는 예문록에 수록하게 했다.

여하튼 예문관의 기능 중 중요한 부분은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일과 더불어 전임관이 춘추관의 사관을 겸했던 만큼 실록의 편찬 등 국가의 공식 시행사 일체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이는 지배층의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승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시대상을 풍부하게 밝힐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실록의 편찬과 함께 왕의 자료 조사에 응하는 일도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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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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