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봉수(鞍峴烽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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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안산(鞍山) 정상의 무악동봉(毋嶽東峯)과 무악서봉(毋嶽西峯)의 봉수.

개설

안현봉수는 무악동봉과 무악서봉을 가리킨다. 무악(毋嶽)은 조선시대에 안산, 안현(鞍峴), 또는 길마재로 불리기도 하였다. 오늘날 안현에는 약 50m의 거리를 두고 동쪽과 서쪽에 각 1기씩 2기의 봉수가 위치해 있다. 그중 무악동봉은 평안도와 황해도, 경기도에서 육로로 전해지는 신호를 받아 이를 최종적으로 목멱산(木覓山) 제3봉수에 전달하였다. 그에 비해 무악서봉은 평안도와 황해도, 경기도에서 수로로 전달되는 신호를 받아 목멱산 제4봉수에 전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무악동봉과 서봉은 1423년(세종 5) 한양 남산에 5개소의 봉수를 설치할 때, 그에 대응하는 봉수로 설립되었다(『세종실록』 5년 2월 26일). 두 봉수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는 최초의 지지(地誌)는 『세종실록』「지리지」이다. 그에 따르면 무악동봉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육로로 오는 신호를 받아 고양 소달산봉화(所達山烽火)에 전하고, 서봉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해로로 오는 신호를 영서역(迎曙驛) 서산봉화(西山烽火)에 전하였다.

조직 및 역할

무악동봉과 서봉은 약 50m의 거리를 두고 인접해 있다. 따라서 두 봉수를 유지 및 관리하는 데 필요한 각종 물품과, 번(番)을 섰던 봉수군 인원은 통합적으로 관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29년(영조 5)에 거화를 소홀히 한 안현과 목멱산의 봉장(烽將) 및 봉졸(烽卒)을 치죄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왕은 두 곳의 봉장에게 곤장을 칠 것을 명하고, 봉졸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5년 6월 16일).

변천

1423년에 조성된 안현봉수는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운영되었다. 그러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에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됨에 따라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안현의 두 봉수 중 무악동봉은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에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봉수의 형태는 전(塼)으로 쌓은 수원 화성봉돈과 비슷하게 화강석으로 쌓아서 연조(烟竈) 1기를 만들었다. 반면 무악서봉은 흙을 쌓아 만든 연대(煙臺) 형태인데, 상부에 통신탑이 설치되어 그 본래 모습이 훼손되었다.

한편, 무악에서 봉화를 올리는 모습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鄭敾)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40년(영조 16) 초가을, 양천현령으로 재임하던 정선은 황혼 무렵에 강 건너 무악에서 거화되던 봉화 불빛을 보게 되었다. 이때의 감흥을 표현한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한다. P00012528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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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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