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계(修理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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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가를 수리할 때 소요되는 돗자리·종이·기름 등을 공물로 바치던 공계.

개설

궁궐의 많은 건물들은 수시로 수리를 해야 하였다. 대동법 이후 그때그때 소요되는 돗자리·종이·기름·뜸 따위를 수리계(修理契)에서 납품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동법 이후 궁중과 관청에서 쓰는 물품을 납품하는 청부업자를 공인(貢人)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정부에서 특정 물품의 조달권을 부여받아 1년에 일정한 양의 물품을 조달하고 그 대가인 공가(貢價)를 대동미(大同米)로 환산해서 받았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계(契)라는 일종의 동업조합을 조직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공계(貢契)라고 하였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선혜청에서 6도(道)의 57공(貢)에 공가를 지급하였는데, 그중 수리계가 들어 있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수리계의 소속은 호조(戶曹)였지만 공가(貢價)는 선혜청에서 지급하였다. 이런 점 때문에 유재(遺在)가 발생하여도 양쪽에서 해결해 주지 않는 허점이 있었다(『영조실록』 36년 8월 2일). 수리비가 해마다 같지 않아 일정한 액수를 정할 수는 없지만, 매년(해마다) 사용하는 경비는 많게는 쌀 10,000석에서 적게는 수천 석에 이르는데도 불구하고 공가는 6,000석 정도에 불과한 문제도 있었다.

수리계는 궁궐 수리용 물품만 납품한 것이 아니라, 규장각의 인쇄용 백면지(白綿紙), 과거 시험장 돗자리, 행궁 제사 때 사용하는 유둔(油芚), 관리들 회의 시 사용하는 별문석(別紋席) 등도 납품하였다.

변천

수리계는 자신들의 영업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지만, 타(다른) 공계와 통합하며 그 영역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용문석자계(龍紋席子契)의 공인들은 자신들을 공인으로 삼아 줄 것을 당국에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중간에 수리계에 통합되고 말았다. 또 경상도의 8읍에서는 주민들이 돗자리[席子]를 만들어 중앙으로 공물을 바쳤는데, 그 일이 고되어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이를 경공(京貢)으로 돌려 수리계 공인들이 구입하여 납입하게 하였다. 이러한 업무 영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수리계는 누적된 적자로 몸살을 앓았다. 이에 1811년(순조 11) 적자의 합계가 40,000여 석에 이르렀다.

비단 수리계뿐 아니라 공물계는 19세기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생산자에게 공물 값을 지불하고도 공물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관리들의 수탈도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공납권은 공계의 경쟁자였던 시전상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변광석, 『조선 후기 시전상인 연구』, 혜안,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