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역(碧蹄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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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영서도에 속한 역.

개설

벽제역(碧蹄驛)은 고려시대에는 개경과 남경 사이의 역로상의 역들로 구성된 청교도(靑郊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개편이 진행되면서 경기우도정역찰방에 소속되었으며, 성종대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영서도(迎曙道)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중국과의 사행로(使行路)에 위치하여, 주로 중국 사신의 접대 및 영송 업무를 맡아보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청교도에 소속된 15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문종대 이후에 청교도에 편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의 명칭은 벽지역(碧池驛)이었으며, 양주 고봉현(高峯縣)에 위치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의 벽제역은 중국과의 사행로에 위치하였는데, 중국 사신은 한양에 들어가기 전날 벽제역의 객사에서 유숙하였다. 그에 따라 사신의 접대와 영송 등 벽제역의 잡역 부담은 다른 역에 비해 과중하였다. 그리하여 1420년(세종 2)에는 정역(正役) 1명과 봉족(奉足) 2명을 1호(戶)로 편성한 전운노비(轉運奴婢) 10호를 배속하였고(『세종실록』 2년 8월 12일), 1424년(세종 6)에는 사신들이 사용할 이부자리와 안자(鞍子) 즉 안장 등을 제용감(濟用監)과 공조에서 지급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6년 10월 25일). 또 1425년(세종 7) 당시 벽제역에서 사신의 영송과 수발을 담당한 인원은 5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병조의 건의에 따라 정원을 기존의 8명에서 14명으로 확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 3일).

한편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대가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이 일대에서 왜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이 건국된 뒤 역의 명칭은 벽제역(碧蹄驛)으로, 조선 건국 초부터 전국적인 역로 재편 작업이 진행되면서 벽제역은 영서역(迎曙驛)·마산역(馬山驛)·동파역(東坡驛) 등과 함께 경기우도 정역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이 되었다.

그 뒤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확정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는 영서도에 소속되어, 영서도찰방의 지휘 아래 중국 사신의 영송을 담당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서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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