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사(廣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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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고종 21) 서울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사 겸 인쇄소.

개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출판사로 활자와 기계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 결과 갑신정변 이후 『한성주보』를 인쇄할 만한 정도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이후 광인국으로 이름을 바꾸어 근대적 농서를 대거 간행하는 등 개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84년 2월 무렵 설립된 출판사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 2월 21일자에 의하면 “도성 내에 또한 광인사가 있어 각기 자금을 모아 별도로 회사를 설립하여 장차 서적을 출판하여 이익을 도모하는데 더욱 번창하리라.” 하여 서울에서 여러 명이 자본을 모아 영리를 목적으로 서적을 출판하는 근대식 출판사의 모습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와 개화인사들 주도의 『한성순보』 간행을 주관하던 박문국(博文局)이 1884년 10월 갑신정변 과정에서 파괴되고 신문 간행도 중지되었다. 이후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박문국의 관원이 광인사로 자리를 옮겨 중단된 『한성순보』를 다시 간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조선 조정에 요청했고, 1885년 3월 28일 고종이 윤허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볼 때 광인사는 신문을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의 인원과 설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한성순보』는 1886년(고종 23) 1월 속간될 때 『한성주보(漢城周報)』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한편 박문국이 해체된 후 광인사가 그 역할을 대신했고, 광인사는 이후 광인국(廣印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85년 10월 29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평안감사에게 보낸 공문에 의하면, 『충효경집주합벽(忠孝經集註合壁)』 800권과 농서(農書) 400부(매부 8권)를 내려 보내니 도착하는 즉시 나누어 정가대로 팔라고 한 사실이 등장하는데, 이때 내려 보낸 책들은 광인국에서 인쇄한 것이다. 정부가 농서를 지방에 적극 보급하려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농정신편(農政新編)』의 저자인 개화인사 안종수(安宗洙)가 당시 통리아문 주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므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광인국에서는 1889년(고종 26)에 강위(姜瑋)의 시문집인 『고환당수초(古歡堂收艸)』 4권 2책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간행 활동은 많이 위축되어 특별한 활동은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1895년(고종 32) 3월 4일 학무아문이 전 광인사를 일어학교(日語學校) 부지로 수용한다는 기사가 보이고, 다음 날인 3월 5일 광인사가 비어 헐었으나 약간의 인쇄물 등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남은 물건을 옮기겠다는 한성부경무청의 보고를 끝으로 광인사에 더 이상 관련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1889년 이후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1895년 3월 이후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각사등록(各司謄錄)』
  • 趙璣濬, 『韓國企業家史』, 朴英社, 1973.
  • 李光麟, 「農政新編에 對하여」, 『역사학보』37 , 1968.
  • 李光麟, 「漢城旬報와 漢城週報에 對한 一考察」, 『역사학보』38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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