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시서(京市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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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조선초까지 호조의 지휘를 받으면서 수도의 시전(市廛)을 감독하던 관서.

개설

경시서는 고려 목종 때 처음 설치되었지만 관서로서의 체제는 문종대에 이르러 갖추었다. 시전(市廛)을 검속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경시서의 제도와 기능은 유지되었다. 그 후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의 편찬에 따른 대대적인 관제개정 때에 평시서(平市署)로 개칭되었고, 이후 조선말까지 계승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시서는 시전을 검속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물가의 안정을 위해 물건의 값을 정한다거나, 통용되는 화폐에 표인(標印)을 찍는 일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정한 관제에서는 시가(市價)를 균평하게 하고 간사한 짓을 다스리며 세금을 부과하는 일 등을 담당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이를 위해 1년 또는 3개월 단위로 분대감찰(分臺監察)과 함께 시장의 물가를 정하기도 하고, 두곡(斗斛)과 저울을 검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대에는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경시서가 주로 이 일을 담당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 문종 때에는 정7품의 영(令) 1명, 정8품의 승(丞) 2명과 함께 이속(吏屬)으로 사(史) 3명, 기관(記官) 2명을 두었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이어지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종5품의 영 1명, 종6품의 승 2명, 종8품의 주부(注簿) 2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관직 각각의 구체적인 역할은 사료의 제약으로 알 수 없다.

변천

경시서는 1405년(태종 5)에 육조의 속아문(屬衙門) 제도를 정할 때 호조(戶曹)의 속아문이 되었고, 1414년(태종 14)에는 종6품의 승을 주부로 고치면서 종전의 주부는 녹사(錄事)로 개칭하였다. 1422년(세종 4)에 저화의 유통이 저조하고 물가가 폭등하자 영의정 등 3명을 경시서 제조(提調)로 임명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세종실록』 4년 10월 13일).

세조대 초기에는 영을 없애는 등 한때 조직이 축소되기도 했지만, 1462년(세조 8)에 이르러 한성부 판관(判官)과 익위사(翊衛司) 익찬(翊贊) 각 1명을 겸차(兼差)하면서 다시 조직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세조실록』 8년 3월 21일). 그리하여 1466년 경시서를 평시서로 개칭할 때에 겸서령(兼署令)을 다시 영으로 하여 녹관(祿官)으로 임명하고 겸승(兼丞)을 없앰으로써 다시 종5품 아문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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