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진(白翎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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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 장연현(현 인천광역시)에 설치된 수군 진영.

개설

백령도는 황해도 바닷길의 요충지에 있다. 고려 때 수군진영을 설치하여 진장(鎭將)을 파견하였으나, 바닷길이 험하여 수군진을 혁파하였다. 조선 세종 때 백령도에 목장(牧場)을 만들어 말 170필을 방목하였고, 선박 건조용 목재를 마련하기 위해 송전(松田)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장연현]. 또 1609년(광해군 1)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수군첨절제사를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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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 백령도에 왜구가 출몰하여 섬 주민들의 거주가 금지되었다. 조선 명종 때 이른바 황당인(荒唐人)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이 백령도 근해에 출몰하였다(『명종실록』 2년 2월 12일).

이에 조선 정부는 1609년(광해군 1) 백령도에 수군진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월 24일). 그런데 1703년(숙종 29) 황당선의 출몰이 더욱 극심해지자, 이정청(釐整廳)에서 해서(海西) 지방 수군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백령도를 포함하여 소강방어사영(所江防禦使營) 소속 수군이 총 4,571명이었다.

조직 및 역할

백령도에 수군진을 설치한 것은 17세기이다. 백령진 소속 수군은 토지를 개간하고, 소금을 구웠으며, 숯을 만들어 상납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7월 21일).

1705년(숙종 31)에 우의정 이유(李濡)의 건의로 백령진을 대청도로 옮겼다(『숙종실록』 31년 7월 11일). 1731년(영조 7) 비변사에서 백령도 목장을 대청도로 옮기고, 목장 터를 개간하도록 허용하였다(『영조실록』7년 10월 17일).

19세기에 백령진 인근 해역으로 중국·영국·포르투갈 등 이국선이 몰려왔고, 백령도진에 파견된 수군이 이를 방어하였다.

변천

17세기 백령도에 수군진이 창설되어 황당선을 방어하였다. 18세기에 백령도진은 인접한 대청도로 일시 옮겨졌고, 백령도 목장이 개간되어 섬 주민이 이주하였다.

그러나 중국 황당선의 출몰이 더욱 심해지자, 대청도에 있던 수군진을 다시 백령도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황해도감사가 대청도에 수군진을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고종실록』19년 12월 20일). 19세기에 대청도는 백령진 소속 부속 섬으로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 「백령진지도」
  •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4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