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영(武衛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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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종 때 무위소·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통합하여 설치한 군영.

개설

무위영은 1881년 12월 25일 기존의 무위소와 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통합하여 신설했으나,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1882년 6월 10일 임오군란으로 폐지되었다. 무위영은 무위소 체제의 확장으로 볼 수 있으며, 기존의 훈련도감 체제를 답습하여 근대식 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개항 후 조선 정부는 새로운 세계 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1880년(고종 17) 12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외교통상과 군국기무를 주관하여 부국강병책을 적극 추진토록 했다. 통리기무아문은 12관서를 두었는데, 그중 군무사(軍務司) 주관으로 일명 별기군인 교련병대를 설치하고, 근대적 신식 군대를 양성했다. 새로이 근대적인 교련병대를 양성하면서 한편으로 전통적 군제를 융통성 있게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교련병대 신설과 더불어 고종은 오군영과 무위소 등으로 난립해 있던 기존의 중앙군제를 양영제(兩營制)로 재편하였다. 1881년(고종 18) 11월 24일 고종은 “이제 각 영을 합하여 양영(兩營)으로 하라.”라고 명령함으로써 군제 개편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통리기무아문은 한 달여 만인 12월 25일 중앙군의 개편안을 보고했다. 주요 내용은 “무위소·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합하여 무위영으로 하고, 금위영·어영청·총융청을 합하여 장어영으로 한다.”는 것으로, 전통적 군제를 2개 영의 체제로 묶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일 곧바로 기존 각 군영의 대장을 해임하고 양영(兩營)의 대장을 임명했는데, 무위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장어대장에 신정희(申正熙)를 지명했다. 이로써 무위영이 공식 출범하였다.

다음 날인 12월 26일 무위영 도제조에 영의정이최응(李最應)을 임명하고, 장어영 도제조에 좌의정김병국(金炳國)을 임명함으로써 최고 군사기구의 지위를 부여하였다(『고종실록』18년 12월 26일). 또한 무위영 제조의 겸직은 전과 같이 하고, 무위대장의 겸임 직제[例兼]는 이전 무위도통사의 사례에 따르도록 했다. 이때 무위영 도제조에 영의정을 임명하고, 무위영 중군(中軍)은 포도대장이나 장어영의 중군직을 역임한 자, 금군 별장은 선기별장이나 장어영 별장을 거친 자로 규정하였다. 이는 궁궐 수비대인 무위영을 도성을 방어하는 장어영보다 중시한다는 뜻이다.

무위영을 설립한 것은 복잡다단한 기존의 군제를 단순화하여 군통수권의 효율성을 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혁 없이 단순히 여러 군대를 조합한 성격에 그치고 있어 실제 군사력 향상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조직 및 역할

무위영의 조직은 도제조 1명, 제조 2명을 두고, 무위대장 이하는 훈련도감 체제를 따르도록 했으며, 금군 별장과 선기별장을 각 1명씩 두도록 했다. 무위영의 편제는 종래 훈련도감 체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전통적인 조선의 군대 체제에 충실한 것으로서 근대적 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참고로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에 나타난 훈련도감의 조직체계를 보면, 정1품 도제조 1명, 정2품 제조 2명, 종2품 대장 1명, 종2품 중군(中軍) 1명, 정3품 별장(別將) 2명, 정3품 천총(千摠) 2명, 정3품 국별장(局別將) 3명, 종4품 파총(把摠) 6명, 종6품 종사관(從事官) 4명, 종9품 초관(哨官) 34명, 지구관(知彀官) 10명, 기패관(旗牌官) 20명, 별무사(別武士) 68명, 군관 17명, 별군관 10명, 권무군관(勸武軍官) 58명, 국출신(局出身) 150명 등이다.

무위영은 국왕 호위와 궁궐 숙위를 맡았으며,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를 참배할 때도 호위하였다. 1882년 왕세자 혼례 때는 신부 집을 호위하였으며,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와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제조를 주관하기도 했다.

변천

무위영은 숙위군인 무위소가 중심이 되어 훈련도감과 용호영·호위청 군대를 흡수·통합한 것이므로 무위소의 확장 내지 증강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도성을 방어하는 훈련도감까지 궁궐 수비군으로 재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위영은 임오군란 직후, 옛 군제로 환원되던 1882년 6월 10일 혁파됨으로써(『고종실록』 19년 6월 10일) 본래의 설립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조선 군제는 청나라의 식민지적 외압 아래 청국식 친군영체제로 정비되어 갔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통편(大典通編)』
  • 『일성록(日省錄)』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최병옥, 『개화기의 군사정책연구』, 경인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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