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산봉수(鷄鳴山烽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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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봉수로에 속한 내지봉수(內地烽燧)로서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의 계명봉 중턱에 봉수.

개설

조선시대에 부산 다대포진(多大浦鎭) 응봉(鷹峰)에서 처음 봉화가 오르면 직봉 노선에 있는 봉수에 전달되어 구봉(龜峰)을 거쳐 황령산(荒嶺山)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육로로 양산의 위천(渭川)에 연결되었다. 계명산봉수는 1464년(세조 10) 이전에 설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철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계명산봉수는 경상도 동래부에 속하여 동래부사의 지휘를 받았다. 주로 대마도 방면에서 침입하려는 왜구의 침입 여부를 앞뒤로 연결되도록 정해진 대응봉수와 거화를 통해 한양의 경봉수(京烽燧)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변천

계명산봉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지리지는 1469년(예종 1)에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이다. 이 책에는 동래현 황령산봉화(荒嶺山烽火)의 서쪽 대응봉화로 표기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남쪽으로 황령산, 북쪽으로는 양산군 원적산(圓寂山)에 대응한다고 되어 있다.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계명산봉수는 경상도 동래진 동래도호부에 속하며, 동래부 북쪽 20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 남쪽으로 황령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양산 위천(渭川)에 응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는 40리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64년(세조 10) 2월 15일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창원부 봉산(峯山)과 양산군의 계명산봉화는 둘 다 낮고 작아서 먼 곳과는 서로 통하기가 어려우므로, 봉산봉화는 합산(合山)으로 옮기고, 계명산봉화는 위천역(渭川驛)북산(北山)으로 옮기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이설을 허락했다는 내용이다(『세조실록』 10년 2월 15일).

계명산봉수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되면서 철폐되었다. 이후 1976년에 화강석을 이용해 6각 형태로 복원하였으나, 본래 모습과는 다르게 조성되어 그 원형을 상실하였다. 아울러 북동쪽에는 과거 봉수군의 건물 터가 남아 있다. P00012505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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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귀혜, 『釜山地方의 烽燧臺 硏究』,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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