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골봉(麻骨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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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봉수로 간봉 제2노선에 속한 내지봉수(內地烽燧)로, 오늘날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의 지릅재 남쪽 산봉우리에 위치.

개설

조선시대에 거제의 가라산(加羅山)에서 처음 오른 봉화가 차례로 정해진 봉수를 거쳐 문경 탄항(炭項)에 이르면 마골봉에서 그 신호를 받아 충주의 주정산(周井山)에 전달하였다. 이후 충주 마산에서 직봉과 합쳐진 뒤 경기도의 여러 봉수를 경유하여 당일 초저녁에 천림산(天臨山)에 이르면, 최종적으로 남산 제2봉수에서 그 신호를 확인하고 거화하였다. 1454년(단종 2)을 전후한 시기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철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상도 남해안을 침범하는 왜구의 침입 여부를 한양의 경봉수(京烽燧)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봉수를 통한 신호 전달은 국가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1786년(정조 10)에는 마골봉에서 봉화를 피우지 않은 원인에 대해 보고하지 않은 절도사 구세적(具世勣)이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0년 8월 22일).

조직 및 역할

마골봉은 충청도 충주목 연풍현(延豊縣)에 속하였으며, 충청병사(忠淸兵使)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여지도서』의 충청도 연풍현 군병(軍兵) 조항에 따르면, 봉수군에는 봉수별장(烽燧別將) 2명, 감관(監官) 10명, 봉군(烽軍) 50명, 보(保) 150명 등이었다. 하지만 이는 같은 지역에 위치한 주정봉수(周井烽燧)의 인원을 포함한 수이므로, 실제로는 이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이 번을 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마골봉은 조선시대 전(全) 기간 동안 운용되었다. 최초의 지지(地誌)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마골점봉화(麻骨岾烽火)로 불리며 연풍현의 북쪽에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문경 탄항에, 서쪽으로는 주정산에 응하였다. 이후에 간행된 지지의 내용도 대부분 변동 없이 거의 동일하다. 다만 『대동지지』에서는 마골봉을 계립령(鷄立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는 마골봉이 위치한 지릅재가 예로부터 소백산맥을 넘는 주요 교통로 중 하나인 계립령 노선의 요지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에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되면서 마골봉 역시 그 역할을 다하였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봉수제가 폐지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봉수의 거화와 관련된 연조(煙竈) 등의 시설은 확인할 수 없고 소나무와 잡목만 무성하다. 다만 봉수 내부 남동쪽 모서리에 산신당이 남아 있으며, 매년 미륵리 주민들에 의해 산신제가 거행되고 있다. 봉수 외부에서는 봉수군의 거주지 및 부속 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자기와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다수 채집되고 있다. P00012561 01.PNG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 서원향토문화연구소, 『忠北의 烽燧』, 서원향토문화연구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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