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감(軍器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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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 시대에 병기(兵器)의 제조 등을 관장하던 관청.

내용

1392년(태조 1) 7월 관제 개혁을 단행할 때 군기감(軍器監)은 병기·기치(旗幟)·융장(戎仗)·집물(什物) 등의 일을 관장하도록 했으며, 군자감(軍資監)의 예에 따라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감(監) 2명, 종4품 소감(少監) 2명, 종5품 승(丞) 1명, 종5품 겸승(兼丞) 1명, 종6품 주부(注簿) 3명, 종6품 겸주부(兼注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정8품 녹사(錄事) 2명을 배치하였다.

1405년(태종 5) 육조(六曹)의 직무 분담과 소속 관사를 정할 때 병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었고, 1414년(태종 14)의 관제 개혁 때 군기감의 감(監)정(正)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태종실록』 14년 1월 8일). 1423년(세종 5) 각 관청의 제조(提調)·제거(提擧)·별좌(別坐)의 인원수를 줄일 때 군기감(軍器監) 제조는 도제조(都提調) 1명, 제조 2명으로 4명에서 3명으로, 별좌는 3명에서 2명으로 각각 1명씩 축소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군기감의 직장 2명과 녹사 2명을 제용감(濟用監)의 예에 따라 글과 산술(算術)에 능숙하고 근면한 사람을 선택하여 녹사체아직(遞兒職)에 임명하여 그 가운데 유능한 자는 계속하여 차례로 승진시키도록 하되, 7품 2인은 광흥창(廣興倉) 승(丞) 1인과 전옥서(典獄署) 승 1인을, 8품 2인은 선공감(繕工監) 녹사 1인과 장흥고(長興庫) 부직장(副直長) 1인을 옮겨 임명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 29일). 1434년(세종 16)에는 군기감의 사무가 지나치게 많은 까닭에 권지직장(權知直長)의 정원을 20인으로 늘렸다(『세종실록』 16년 4월 7일).

1443년(세종 25)에는 병조 참판을 군기감의 실안제조(實案提調)로 임명하여 군기감에 대한 규찰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나 1445년에 병조의 사무가 복잡하여 군기감에 근무하기 어렵다 하여 참판제조를 혁파하면서, 군기감 제조의 수를 3명에서 2명으로 줄였다.

그동안 군기감의 주성색(鑄成色)은 정(正)·녹사가, 노야색(爐冶色)과 궁전색(弓箭色)은 각각 부정(副正)·직장이, 약색(藥色)은 판관(判官)·주부가, 노비색(奴婢色)은 녹사가 분담하여 담당하고 있었으나, 사무가 매우 번거롭고 바빠 제대로 업무를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1449년(세종 31)부터 노비색을 제외한 사색(四色)에 각각 겸관(兼官) 1인씩을 더 배치하고, 여기에 더하여 4색에 각각 구임(久任) 1인씩을 배치하였다.

1460년(세조 6)이 되면 군기감 겸정(兼正) 1인·겸부정(兼副正) 1인·겸판관(兼判官) 1인·겸주부(兼注簿) 1인을 모두 혁파하였고, 이어 군기감의 체아직 5인을 부관사(副管事) 1인·전사(典事) 1인·부전사(副典事) 1인·급사(給事) 2인으로 정하였다.

마침내 1466년(세조 12) 관제 개혁에서 군기감을 군기시(軍器寺)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직장·녹사를 각각 1인씩 없애는 대신 판관·주부·부봉사·참봉을 각각 1인씩 더 배치하였다. 이 체제가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 반영되었다.

참고문헌

  • 김일환, 「조선초기 군기감의 무기제조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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