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죽(豆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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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나 팥을 주재료로 만든 죽.

개설

두죽은 콩이나 팥으로 만든 죽을 가리킨다. 문헌에 기록된 두죽은 경우에 따라서 콩죽이 될 수도 있고, 팥죽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문맥을 통해서 콩죽인지 팥죽인지 구분해야 한다.

만드는 법

두죽 만드는 법은 1924년에 출판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나온다. 한글로 콩죽, 한자로 태죽(太粥)이라 적었다. 좋은 콩을 씻어서 솥에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불려서 살짝 삶은 다음에 그릇에 펴 놓고 손으로 한참 으깨어 껍질을 벗긴 후 맷돌로 간다. 쌀은 콩의 1/3쯤 하여 갈아서 콩즙과 섞는다. 한참 물에 넣고 앉힌 다음에 윗물만 떠서 솥에 붓고 주걱으로 계속 저어 가면서 끓인다. 소금을 쳐서 먹는다.

같은 책에 팥죽 만드는 법도 나온다. 멥쌀 한 되에 붉은 팥은 두 되가량으로 주재료를 마련한다. 먼저 팥을 씻어 솥에 넣고 물을 많이 부은 후 오랫동안 삶는다. 삶은 팥을 손으로 으깨서 굵은 체에 걸러서 물에 가라앉힌다. 윗물만 솥에 붓고 쌀을 씻어 넣고 끓이다가 한참 끓으면 주걱으로 젓는다. 찹쌀가루로 반죽을 하여 새알처럼 둥글게 빚어 죽이 끓을 때 넣는다.

연원 및 용도

콩죽과 관련된 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반도에서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콩으로 만든 죽은 오래전부터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팥죽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김매순(金邁淳)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 “가정에서 팥죽으로 귀신을 몰아낸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비롯한 것으로 결코 우리 풍속은 아니다.”라고 했다.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 6세기경의 중국 양나라 사람 종름(宗懍)이 지은 『형초세시기(荆楚歲時記)』를 인용하여 동지 팥죽의 유래를 “공공씨(共工氏)에게 모자란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 죽어 역질 귀신이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했으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 역질 귀신을 물리친다.”고 했다.

조선에서 두죽은 크게 다음과 같은 의미와 용도로 사용되었다. 첫 번째는 ‘두죽맥반(豆粥麥飯)’의 고사를 비유할 때 쓰인 경우이다. ‘두죽맥반’은 동한(東漢)을 개국한 광무제(光武帝)유수(劉秀)가 싸움에 패하여 도망을 다닐 때 간신히 끼니를 해결한 사건에서 유래한다. 유수가 겨울에 계성(薊城)을 탈출하여 도망칠 때 날이 저물어 인가도 없고 쉴 곳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부하 풍이(馮異)가 어디에서 구했는지 한 그릇의 콩죽을 가지고 왔다. 유수는 콩죽을 먹고서야 몸이 따뜻해졌다. 이런 사연으로 인해서 도성을 버리고 난리를 피했던 선조와 인종이 ‘두죽맥반’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언급했다. 임진왜란이 난 상황에서 신하들은 선조에게 서로 다투는 논쟁을 벌였다. 상소문 중에 인재를 구하는 모습을 동한의 광무제유수가 호타하(滹沱河)를 겨우 건너서 콩죽과 보리밥을 달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풍이’라는 인재 때문임을 비유했다(『선조수정실록』 22년 4월 1일). 임진왜란 이후 신하들은 선조에게 비단 옷 입고 좋은 음식 먹을 적에 콩죽이나 보리밥 먹던 때를 생각하라는 간언을 올렸다(『선조실록』 39년 11월 4일).

두 번째는 동지에 먹는 팥죽을 두죽이라고 지칭한 경우이다. 이 경우 ‘지일두죽(至日豆粥)’이라 하여 동지 때 먹는 팥죽임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 46년 10월 8일). 하지만 동지 때의 팥죽을 그냥 두죽이라 적기도 했다(『영조실록』 46년 11월 6일).

세 번째는 두죽이 일종의 뇌물로 비유된 경우이다. 영조 때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는 면직을 당했는데, 그 사유가 그가 호남에 어사로 갔을 때에 친분이 있던 사람들로부터 콩죽을 대접받은 일 때문이었다. 한갓 콩죽을 대접받고 상소를 받아 면직을 당했다는 한탄을 내보였다(『영조실록』 23년 1월 22일). 하찮은 음식인 콩죽이 뇌물이 된 경우이다.

네 번째는 왕실에서 병환이 들었을 때 약과 함께 두죽을 올린 사례이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1701년(숙종 27)에 중궁전(인현왕후)이 병환에 들자 수라와 함께 두죽을 올렸다고 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고려시대부터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속이 있었다. 이색(李穡)은 『목은시고(牧隱詩藁)』에서 동지에 얽힌 사연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조렸다.

동지가 되면 음이 극에 이르지만 / 冬至陰乃極

이 때문에 양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네. / 故有一陽生

성인(聖人)은 그것을 매우 좋은 징조라고 여겨서 / 聖人喜之甚

그 괘(卦)를 회복한다는 의미로 복괘(復卦)로 이름하였네. / 考卦以復名

이날은 하늘의 봄이라 말해지니 / 是曰天之春

만물이 이로부터 싹을 트기 시작하네. / 萬物所由萌

사람의 마음도 욕심에 가려졌다가 / 人心敝於欲

착한 단서가 이때로부터 드러난다네. / 善端時露呈

그러한 마음을 키우는 일은 군자에게 달렸으니 / 養之在君子

다름 아니라 성실함이 가장 먼저이네. / 匪他先立誠

예(禮)가 아닌 것을 부지런히 버려야만 / 勤勤去非禮

비로소 밝은 본성을 보게 되리라. / 始見本然明

팥죽을 먹고 오장을 깨끗하게 씻으니 / 豆粥澡五內

혈기가 골라져서 평온해지네. / 血氣調以平

이렇듯 점점 커진 믿음이 얕지 않으니 / 爲益信不淺

성인의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구나. / 可見聖人情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는 갈수록 분명해지지 않으니 / 世道漸以降

언제 세상이 온전하게 돌아갈까. / 理功何日成

조선후기에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에서 당시 사람들이 동지가 되면 “찹쌀가루로 새알 모양을 만들어 팥죽에 넣고 꿀을 타서 먹는다. 문짝에 팥죽을 뿌려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고 했다. 이런 사정은 19세기 초반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당시의 동짓날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동짓날은 작은 설이라고 부른다. 팥죽을 쑤며 찹쌀가루로 새알 모양을 만든 떡을 죽 속에 넣어 심(心)을 삼는다. 여기에 꿀을 타서 명절음식으로 먹고, 사당에도 바친다. 팥죽 국물을 문짝에 뿌려 좋지 않은 일을 없앤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도잡지(京都雜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목은시고(牧隱詩藁)』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 『형초세시기(荆楚歲時記)』
  • 『후한서(後漢書)』
  • 주영하(외), 『한국 고중세 세시풍속 자료 집대성』, 국립민속박물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