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木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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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나무의 열매.

개설

모과[木瓜]는 가을이면 노랗게 익으며, 육질이 아주 단단하지만 향이 좋은 과실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 이남의 전역에서 생산되었다. 궁중과 민간에서 약용·식용으로 두루 쓰였으며, 주로 모과차·모과주·모과죽·모과정과 등으로 만들어 먹었다.

원산지 및 유통

중국이 원산지인 모과는 중국과 한국에서 자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모과는 경기도·전라도·강원도의 공물(貢物)로서, 경기도에서는 수원도호부 안성군, 충청도에서는 청주목 온수현·신창현·영동현·청산현, 공주목 연산현·서천군·정산현·회덕현, 홍주목 청양현, 충주목 괴산군, 전라도에서는 전주부 금산군, 담양도호부, 장흥도호부 무진군·화순현, 제주목, 남원도호부 무주현·곡성현, 강원도에서는 강릉대도호부와 삼척도호부에서 생산되었다. 허균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예천(醴泉)에서 생산되는 모과가 가장 좋으니, 맛이 배와 같고 즙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연원 및 용도

왕실에서 모과를 약용으로 쓸 때는 다른 약재와 함께 섞어서 약을 조제하거나, 다른 약을 먹을 때 모과차와 함께 먹도록 했다. 선조대에 도제조(都提調) 이항복(李恒福) 등이 왕의 건강을 근심하며, 삼령백출산(蔘苓白朮散)에 건갈(乾葛)·맥문동(麥門冬)·모과[木果]·오미자(五味子)를 가미하여 드시도록 아뢰어 허락받았다(『선조실록』 32년 윤4월 26일).

『승정원일기』 1639년(인조 17) 11월 11일의 기록을 보면, 평위산(平胃散)에 모과 등의 약재를 더한 약을 왕이 복용하도록 하였고, 1724년(영조 즉위) 10월 2일에는 대왕대비의 담병(痰病)에 좋다는 사유환(蛇油丸)을 모과차에 타서 드시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 특히 모과는 담증(痰證)이라 하여 가래로 고생하는 경우에 복용하였다. 광해군이 담증이 있어서 모과를 약으로 오래 복용하였고(『광해군일기』 1년 10월 21일), 인조 역시 심한 담증 때문에 모과전(木瓜煎)을 지어 올리라고 하교한 일이 있다.

조선시대에 모과를 재료로 만든 음식에는 모과차·모과주도 있지만, 왕실에서는 특히 모과정과가 많이 이용되었다. 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 등의 크고 작은 왕실 연회상에는 반드시 각색정과(各色正果)가 올랐는데, 각색정과에는 모과정과를 얹어 내었다. 모과정과의 제법[木瓜煎法]은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나오는데, 『이조궁정요리통고(李朝宮廷料理通攷)』의 만드는 방법과 같이 껍질을 벗기고 얇게 저민 모과를 꿀 또는 설탕에 쫄깃해질 때까지 뭉근하게 끓여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도문대작(屠門大嚼)』
  • 『산림경제(山林經濟)』
  • 한희순·황혜성·이혜경, 『李朝宮廷料理通考』, 학총사,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