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어(北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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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과의 바닷물고기.

개설

명태를 말한다. 겨울철이 제철인 생선으로 함경도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북어(北魚)는 지역과 가공법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매우 다양한데, 생태·동태·북어·황태와 같은 이름은 가공법에 따라 세분화한 명칭이다. 북어는 머리에서부터 뼈·껍질에 이르기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생선으로 회나 무침·국·찌개·조림·전유어·식해 등의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알과 창자로는 각각 명란젓과 창난젓을 담가 먹었다.

원산지 및 유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북어는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되었다.

연원 및 용도

북어는 명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조선후기 문신인 이유원(李裕元)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이 물고기가 명태라는 이름을 갖게 된 기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명천(明川)에 사는 태씨(太氏) 성을 가진 어부가 어느 날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고을 관청에 바쳤다.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맛있게 먹은 후 이름을 물었더니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자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명태에 얽힌 또 다른 설도 있다. 함경도 사람들 중에는 영양부족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럴 때 북어의 간유(肝油)를 먹으면 어두운 눈이 거짓말같이 밝아져서 명태라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북어는 명태를 말린 것을 의미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북어가 명태와 혼용되었다. 강원도 이북에서는 생명태를 북어라 불렀고, 북방에서는 회유해 온 명태라는 의미로 북어라고 칭하기도 했다. 또한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 물고기의 이름은 북어인데, 민간에서는 명태(明太)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봄에 잡히는 것은 춘태(春太), 겨울에 잡히는 것은 동태(冬太), 동짓달에 시장에 나오는 것은 동명태(凍明太)라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북어는 지역과 잡히는 시기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달랐을 뿐 아니라, 가공법 및 상태에 따라서도 명칭이 세분화되었다. 얼리지 않은 것은 생태, 잡자마자 바로 얼린 것은 동태, 계절과 상관없이 바닷바람으로 바짝 말린 것은 북어, 추운 겨울날에 밤에는 얼고 낮에는 녹는 과정을 반복해 가며 황금색으로 말린 것을 황태라고 하였다. 북어는 각각의 상태에 따라 쓰임새가 달랐는데, 예를 들면 생태와 동태는 신선하고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는 탕에 사용하였고, 북어와 황태는 국이나 국물을 낼 때, 그리고 조림이나 찜을 만들어 먹을 때 사용하였다.

북어가 이와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되었던 것으로 볼 때, 그만큼 소비자들에게 친숙하고 의미 있는 생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북어는 매일같이 밥반찬으로 쓰인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여항(閭巷)의 가난한 백성들은 신령에게 제사를 모실 때 말린 것으로 중요한 제수를 삼고, 가난한 선비들의 집에서도 제사 때 올려야 하는 각종 고기 제물을 이것으로 대신한다고 하면서, 값은 싼 데 비해 귀하게 쓰인다고 적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북어는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가장 널리 식용된 생선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북어는 머리에서부터 뼈와 껍질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는 생선이다. 우선, 북어의 머리와 뼈는 국물을 내는 데 사용하고, 살코기와 내장(곤)으로는 국이나 찌개를 끓인다. 알과 창자로는 젓갈을 담아 먹는데, 북어 알은 명란젓, 북어 창자는 창난젓으로 각각 만들어진다. 또한 껍질과 눈알은 살짝 튀기거나 구워서 술안주로 사용하고, 간장은 간유(肝油)의 원료로 썼다.

조선후기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북어를 이용한 음식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북어는 회를 쳐서 고추장 양념을 넣고 주물러 먹거나, 살을 잘게 뜯어 양념을 넣어 무쳐 먹거나, 두부를 부치고 북어를 토막 낸 후 섞어서 조려 먹었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다른 생선들과 마찬가지로, 북어를 이용해 식해 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흰 멥쌀밥에 엿기름을 많이 넣고 누룩가루를 조금 넣어 물과 함께 발효시킨다. 그런 다음, 잘게 썬 북어를 소금과 함께 버무려 넣고 잘 숙성시키면 북어식해가 된다. 이외에도 명탯국, 명태조림, 명태찌개, 전유어 등의 음식을 만들어 먹곤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군량(軍糧)의 하나로 여겨진 듯하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 민간에서 조선 군대에 양식을 제공하였는데, 이때 북어도 들어 있었다(『고종실록』 3년 10월 20일). 1884년(고종 21)에는 함경도의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이 북청에 사는 이원필(李原弼)을 잡아 가두고 북어 180태를 거저 빼앗았으며, 홍원·북청·이원·단천의 어상(魚商)들에게 북어를 절반 값만 주고 사는 등 가렴주구를 하여 함경도 유생들의 원망을 받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1년 6월 6일).

참고문헌

  • 『시의전서(是議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정문기, 『魚類博物誌』, 일지사, 1989(1974 초판).
  • 주영하, 「명란이 후쿠오카로 간 사연」, 『식탁 위의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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