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금(林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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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 소교목인 능금나무의 열매.

개설

능금나무의 열매로, 봄에 연한 분홍색의 꽃이 피고, 가을에 주홍색의 핵과(核果)인 열매가 열린다. 열매의 크기는 4~5㎝ 정도로 작고, 잘 익으면 표면에 흰 가루가 생기는 한국 고유의 사과이다. 조선에서 6월에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물품이었다.

원산지 및 유통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에 벌써 능금[林檎]이나 내(柰)가 재배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도 재배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의 과실로 능금, 배, 참외, 복숭아, 대추 등이 있다.”고 하였다. 조선전기의 문헌에서는 여러 품종의 능금이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능금은 경기도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서는 ‘빈파과(頻婆果)’를 능금과 비슷하나 더 크다는 의미를 가진 ‘굴근 님근과(굵은 능금과)’라고 했다. 한자로는 임금(林檎)이라 쓰고, 읽기는 능금이라 읽은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상사과(相思果), 사과(沙果)라는 이름도 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금(檎)’을 속칭 ‘사과(沙果)’라고 부르고, 작은 능금은 ‘화홍(花紅)’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에서 지금과 유사한 사과나무를 재배한 것은 이보다 훨씬 늦은 1600년대 이후로 생각된다. 연행(燕行)을 갔던 조선의 사신이 중국에서 사과나무 묘목을 도입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조경일록(朝京日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김육(金堉)이 북경에서 사과(樝果) 5개를 보내왔는데, 사과는 능금과 비슷하나 약간 크다고 하였다.

한필교(韓弼敎)는 『수사록(隨槎錄)』에 “빈과(蘋果)는 오늘날 사과라고 부른다. 우리 해동에는 예로부터 이 이름이 없었다. 효종 부마인 동평위(東平尉)정재륜(鄭載崙)이 중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묘목을 얻어 돌아왔다. 비로소 나라 안에 성행했다.”라고 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중국의 빈과는 우리나라에서 사과요, 중국의 사과는 곧 우리나라의 능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없었는데, 동평위(東平尉)정재륜(鄭載崙)이 사신으로 갔을 때 가지에 접을 붙여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 우리나라에 비로소 많이 퍼졌으며, 그 이름이 잘못 전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초환(兪初煥)의 『남강만록(南岡漫錄)』에는 “사과(査果)는 능금과 같으나 크기가 몇 배이고, 또한 맛이 담담하고 달아서 쓰고 떫은맛이 없었다. 효종 갑오·을미 연간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나무를 얻어 구하여 수레에 싣고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것은 일명 빙과(氷果)이다.”라고 하였다.

정재륜이 가져온 사과나무는 빈과 계통의 새로운 품종으로 보인다. 이후로 한국에서도 사과나무를 널리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즉 1800년대 초반에 유초환과 한필교에 의해 한반도에서도 사과나무를 널리 재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량된 사과는 1884년(고종 21)부터 외국 선교사를 통하여 각 지방에 몇 그루씩의 사과나무가 들어오면서부터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관상용으로 재배하는 정도였으며, 대량 재배는 1900년대에 미국 선교사를 통하여 다량의 사과 묘목을 들여와 원산 부근에 과수원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연원 및 용도

능금은 조선에서 의례의 제찬(祭饌)으로, 또 궁중의 연희에 올려졌다.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의정부(議政府)가 빈궁(殯宮)에 사과(査果)와 능금을 각각 1기씩 진향(進香)하고 있고, 1795년(정조 19)의 진찬(進饌)에서는 능금은 9치 높이 한 그릇, 사과는 9치 높이로 올렸다.

조선에서는 종묘와 양전(兩殿)에 천신할 과실류에 벌레가 먹었는지가 염려되었다. 그래서 과실을 쪼개고 깎아서 올릴 것인지 벌레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스러우나, 쪼개고 깎아서 온전치 못한 과실을 올리는 것은 예법에 어긋남을 강조하며 의견이 분분했다. 그에 대한 방안으로 세종대에는 “은행·배·대추·밤·녹리·능금 등 천진(薦進)할 때에 쪼개어 살펴보고, 10분의 8~9분의 벌레가 먹지 않은 것이면 정하게 골라서 올리고, 만약 3, 4분의 벌레가 먹은 것은 다시 고르지 말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3년 6월 8일).

한편 능금나무의 꽃은 봄에 피어야 하나 기후의 변동으로 다른 계절에 만개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있다. 명종대에는 윤7월에 청홍도(淸洪道) 제천(堤川) 객사(客舍)의 능금나무가 봄처럼 피었고(『명종실록』 13년 윤7월 16일), 경상도 창원(昌原)에서는 11월에 능금나무와 탱자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으며(『명종실록』 14년 11월 30일), 11월에 전라도 함열(咸悅: 현 익산)에서 능금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다(『명종실록』 21년 11월 25일)는 보고가 있었다. 숙종대에도 9월에 경기도 마전군(麻田郡: 현 연천)에서 배꽃이 다시 피고, 능금꽃도 재차 피어 열매를 맺은 일이 있었다(『숙종실록』 8년 9월 10일).

『옥담시집(玉潭詩集)』의 「능금을 심고[種林檎]」, 「만물편(萬物篇)」의 ‘능금[林檎]’ 등의 시에서 능금을 기르고 즐겨 먹는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능금’에서는 오얏과 석류보다 좋다고 하였다.

능금[林檎]

첫여름에 눈 같은 꽃 환하고 / 雪花明首夏

초가을에 좋은 열매가 빛나지 / 佳實耀新秋

시원한 맛은 오얏보다 낫고 / 爽味凌朱李

달콤한 맛은 석류보다 좋아라 / 甘眞邁紫榴

얼음을 섞어서 옥사발에 올리고 / 錯氷登玉椀

이슬 젖은 금열매를 딴다 / 和露摘金鉤

뿌리에 물 주어 과일 먹으니 / 漑根能食實

신선의 대추를 찾을 것 있으랴 / 仙棗豈曾求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조지」에는 『제민요술(齊民要術)』의 기록을 빌어 능금을 이용한 음료를 만드는 법을 기록하고 있다. 임금초방(林檎麨方)은 빨갛게 익은 능금을 썰어 씨를 발라내고 햇볕에 말리거나, 능금을 갈거나 빻아서 명주보자기에 걸러 가루로 만든다. 사발에 넣으면 좋은 장(漿)이 된다. 만약 묽거나 싱거우면 임금초 1되와 쌀초 2되로 맛을 조절하여 먹는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지금은 능금을 볼 수가 없으나, 김춘수의 시(詩) 중 「능금」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50년대 당시에는 능금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고려도경(高麗圖經)』
  • 『남강만록(南岡漫錄)』
  •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 『수사록(隨槎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열하일기(熱河日記)』
  • 『옥담시집(玉潭詩集)』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조경일록(朝京日錄)』
  • 『훈몽자회(訓蒙字會)』
  • 김춘수, 『김춘수 시전집』, 현대문학,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