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정지란(巨正之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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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년(명종 14년)에 황해도에서 일어난 민란인 임꺽정의 난.

개설

임꺽정은 양주의 백정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하며 그가 일으킨 난(亂)을 『명종실록』에서는 거정지란(巨正之亂)이라고 한다. 임꺽정의 난은 1559년 3월부터 시작해서 관군에게 소탕되고 임꺽정이 처단을 당한 1562년 1월까지 3년 이상 황해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조선전기 산발적인 민란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오래 계속되었다. 이 난 자체는 황해도에서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에 걸친 지역적 저항이었으나 그 영향은 거의 조선 전체에 미쳤다.

역사적 배경

임꺽정의 난은 정치 기강의 문란과 이에 따른 군정(軍政)의 해이, 농촌 사회의 피폐와 농민들의 몰락,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광범위한 도적들의 무리가 활동하던 것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16세기에는 연산군의 폭정과 사화(士禍), 중종반정 등으로 지배 계급 내부에서의 싸움이 치열하였다. 아울러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와 중앙 재상들의 탐오, 그리고 권세가들의 공공연한 매관과 무뢰한들의 백성 약탈 등으로 농민들은 피폐하고 도적이 늘어 갔다. 임꺽정의 난에 대해 『명종실록』 편찬자는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라 하였다(『명종실록』 14년 3월 27일).

발단

임꺽정의 난이 기록상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1559년 3월부터이지만 이들은 이전부터 활동을 벌여 왔다. 황해도에서는 1557년에 서흥, 우봉, 토산, 신계와 강원도 이천 등지에서 도적들의 활동이 많아지는 가운데 임꺽정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해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삼아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경과

임꺽정의 난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양하였다. 백정 출신인 임꺽정을 비롯해 상인, 장인(수공업자), 노비, 아전, 역리 등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임꺽정의 난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였다 흩어지면 각자 행동하고 민가가 조밀한 곳에 붙어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 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들을 잡기 위해 관에서 서흥에 군사를 집결시켰을 때에는 60여 명으로 나타난다.

임꺽정 일당은 일대의 아전이나 백성들과 결탁해 내통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나기도 하였다. 개성부포도관(開城府捕盜官)이억근(李億根)은 그들의 소굴을 습격했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다(『명종실록』 14년 3월 27일). 명종은 개성부유수에게 두목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리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겁탈을 일삼았다. 또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하며 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1560년 가을에는 봉산, 개성을 거점으로 서울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해 11월에 참모인 서림(徐林)이 체포되었다. 심문 과정에서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것, 또 이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을 여러 차례 잡은 공으로 새로 부임해 온 봉산군수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 탄로났다(『명종실록』 15년 11월 24일).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 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임꺽정 일당은 부장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다(『명종실록』 15년 11월 29일). 이들은 1561년에 들어 황해도, 경기도 북부, 평안도, 강원도 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했으나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로 형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는 등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국가에서는 개성과 평양, 서울의 성내를 샅샅이 수색하였으며 시장을 열지 않고 이들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임꺽정의 난으로 전국 5도(道)의 군졸들이 이들을 잡으려고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해졌고,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임꺽정 일당은 토포사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1562년 1월 서흥에서 체포당하였다(『명종실록』 17년 1월 3일). 명종은 이들을 ‘반적(叛敵)’이라 부르며 반란군으로 규정했고,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하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명종실록』 17년 1월 8일). 조선후기의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임꺽정을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

참고문헌

  • 『성호사설(星湖僿說)』
  • 한희숙, 「16세기 임꺽정의 난 성격」, 『한국사연구』89,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