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첩(平壤捷)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1:05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1593년 1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비하던 일본군을 물리쳐 크게 이긴 전투.

개설

1593년(선조 26) 1월 6일부터 3일간 평양성(平壤城)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사수하던 일본군 수천 명을 살상하고 성을 탈환하였다. 평양성 패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철수하여 도성으로 집결하였다. 이 승전을 계기로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열세에 몰린 전세를 단숨에 반전시킬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발발 이후 20일 만에 도성을 점령당한 조선은, 1592년(선조 25) 5월 임진강 방어선마저 붕괴되자 명(明)에 원군 파견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명은 조선 전토가 점령당할 경우, 요동과 중국의 안전도 확실히 보장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참전 준비에 돌입하였다. 당시 요동의 주력군은 섬서성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발배(哱拜)의 반란 진압을 위해 동원된 상태였기 때문에, 명은 요동부총병(遼東副摠兵)조승훈(祖承訓)에게 4,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1592년(선조 25) 7월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참패를 당하였다. 이 패전 소식에 크게 놀란 명은 전쟁 준비를 충실히 하는 한편 심유경(沈惟敬)을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진(軍陣)에 파견하여 화평 교섭을 진행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1592년(선조 25) 9월 발배의 반란을 진압한 명은 조선 파병의 준비를 완료하고, 같은 해 12월 군무제독(軍務提督)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43,000여 명의 명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게 하였다.

발단

이여송은 1593년(선조 26) 1월 2일 안주에서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柳成龍)과 평양성 탈환 작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숙천에서 머물다가, 휘하 부대를 남하시켜 6일 새벽 1만여 명의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성을 공격할 준비를 완료하였다. 조선군은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의 지휘하에 순변사(巡邊使)이일(李鎰), 좌방어사정희현(鄭希賢), 우방어사김응서(金應瑞), 승병장(僧兵長) 휴정(休靜)이 이끄는 군대가 참전하였다. 6일 명군 일부가 조선 승군의 지원하에 모란봉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성 밖에서 접전을 벌였다. 야간에는 명군의 우영(右營)을 노린 일본군의 기습이 있었지만 격퇴하였다. 7일에는 전군을 동원해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한 뒤 일본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여 30명의 목을 베었다. 탐색전을 마친 명군은 8일 이른 아침부터 전군을 동원하여 평양성의 서북쪽을 촘촘히 포위한 뒤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명군은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위력이 강한 자국의 대·소 화포(火砲)를 집중 발사하여 적의 기선을 제압한 뒤에, 근접전 무기인 방패(防牌)·장창(長槍)·낭선창(狼筅槍)·당파창(鏜鈀槍)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무력화시켰다. 백병전이란 칼이나 창, 총검 따위의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인데, 일본군이 특히 이에 능하였다. 모란봉·칠성문(七星門)·보통문·함구문(含毬門)을 집중 공격한 명군이 성 밖에 겹으로 둘러쌓은 성인 외성(外城)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안쪽의 내성(內城)으로 돌입하자, 일본군은 만수대(萬壽臺)와 을밀대(乙密臺) 쪽으로 도주한 뒤 미리 파놓은 토굴로 몸을 피한 뒤에 조총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여송은 명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하여 군사를 성 밖으로 철수시킨 뒤에, 소서행장에게 저항 없이 평양성을 비우면 퇴로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철수 제안을 수락한 일본군은 1월 8일 밤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여송이 일본군의 철군을 통보하고 퇴로를 차단하지 말 것을 조선 측에 통보하자 조선군은 복병을 철수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평양성을 탈출하던 일본 패잔병은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한성까지 후퇴할 수 있었다. 조선은 평양성 탈환을 계기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 수세에 몰리기만 했던 전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고 이후 명군과 함께 한성 수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경과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적의 수급 1,285개, 말 2,985마리, 군기(軍器) 45,002개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적에게 붙잡혔던 조선인 1,225명을 구출하고 적군 2명을 사로잡았다. 평양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대신과 승지를 보내어 명군의 공로를 치하하였다(『선조실록』 26년 1월 9일). 평양성의 일본군이 철군하자, 퇴로를 차단당할 것을 염려한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도 함경도에서 서둘러 한성으로 철군하였다. 명군이 거둔 전과 가운데에는 상당수 조선인 민간인의 희생자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공의 배분을 놓고 명의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서인한, 『壬辰倭亂史』,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