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빈추숭(恭嬪追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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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즉위한 뒤 생모 공빈김씨를 추숭한 일.

개설

공빈김씨(恭嬪金氏)는 선조의 후궁으로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죽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생모 공빈김씨의 묘소를 개수하고 왕후로 추숭(追崇)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는 서자인 광해군 자신이 적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하들로부터 추숭 작업이 정통을 어지럽히고 명분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는 강한 반대에 부딪쳐 동의를 얻지 못하자 광해군은 독단으로 추숭도감(追崇都監)을 설치하고 공빈을 추존하여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삼았다. 별묘를 세워 봉자전(奉慈殿)이라 하여 신주를 안치하고, 묘를 능으로 고쳐 성릉(成陵)이라 하였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 주청사를 보내어 공성왕후의 고명(誥命)면복(冕服)을 요청하고, 이어 공빈김씨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여 선조의 둘째 적비로서 제사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면서 공빈김씨는 왕후로서의 지위를 빼앗기고 다시 후궁의 지위로 떨어졌다.

역사적 배경

공빈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의 생모이다.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죽었다. 그녀는 후궁이었으나 왕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부터 왕의 생모를 왕후로 추숭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는 서자인 광해군 자신이 적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발단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 2월 19일에 공빈김씨의 묘소를 개수하였다. 이듬해 2월 선조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를 종묘에 부조할 때가 되자 비밀리에 예조(禮曹)의 초기(草記: 각 관서에서 왕에게 올리는 문서)를 홍문관에 내려 공빈의 추숭을 위한 전례를 널리 상고하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2월 18일).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황제의 생모를 추숭한 전례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예조에 명하여 공빈의 추숭 전례를 논의하도록 명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23일])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5월 27일).

경과

광해군의 명에 대해 신하들은 후궁을 높여서 정비(正妃)의 지위로 올리는 것은 정통을 어지럽히고 명분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공빈은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살아 있는 동안 후궁의 신분으로 죽었으므로 그를 후비(后妃)로 추숭하게 되면 정통의 왕후가 둘이 되며, 이것은 제후무이처(諸侯無二妻), 즉 ‘왕은 두 명의 아내를 둘 수 없다’는 예법에 위배되고 ‘첩을 올려 처로 삼지 않는다’하는 『춘추』의 대의를 어기는 것이 되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대통을 계승한 왕의 생모를 높이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특별한 호칭과 휘호를 올려 제사를 융숭하게 하고 사당과 묘역을 성대하게 치장하여 왕의 효성을 다할 뿐, 정통과 명분 자체를 어그러뜨릴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추숭 불가의 핵심은 공빈을 왕후로 추숭하면 두 명을 높이는 것[貳尊]이 되어 예에 어긋나며, 결국에는 적서의 분별을 모호하게 만들어 예법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에 광해군은 생모를 왕후로 추숭하더라도 두 명을 높이는 것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논지를 폈다. 또 예는 본래 정(情)에서 나옴을 강조하면서 권도(權道)로 추숭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동의를 얻지 못하자 3월 29일에 독단으로 추숭도감을 설치하고 공빈을 추존하여 자숙단인공성왕후로 삼았다. 별묘를 세워 봉자전이라 하여 신주를 안치하고, 묘를 능으로 고쳐 성릉이라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29일). 신하들의 반대로 공빈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지 못하고 별묘에 안치하자마자 광해군은 갑자기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라고 명하였다. 역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극력으로 반대하여 저지하였다. 광해군과 신하들은 한 달 이상을 다투다가 명나라의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되자 광해군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공빈의 종묘 부묘는 3년 후에 정인홍이 조정에 들어오자 다시 추진되었다. 정인홍은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명나라에 주청하여 공빈이 정식 왕후로 책봉 받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1613년(광해 5) 12월에 명나라에 주청사를 보내어 공성왕후의 고명(誥命)면복(冕服)을 요청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5년 12월 11일). 마침내 1615년(광해 7) 6월 사은사윤방이 공성왕후의 고명과 책봉 칙서를 받아 귀국하였고, 광해군은 교외로 나가 직접 맞이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7년 6월 13일). 이로써 광해군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린 ‘왕후’ 위호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이어 광해군은 1616년(광해 8) 11월 명에 사신을 보내 공성왕후의 면복(冕服)을 거듭 청하였고,(『광해군일기(중초본)』 8년 11월 4일). 명나라 황제는 관복(官服)을 하사하였다. 광해군은 1617년(광해 9) 8월 19일에 관복을 맞이하는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광해군일기(중초본)』 9년 8월 19일). 8월 27일에는 태묘에 이런 사실을 고한 데 이어 좋은 날을 잡아 문묘에도 전알(展謁)하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9년 8월 27일). 광해군은 친히 별묘인 봉자전에 나아가 공성왕후의 신주를 고쳐 쓴 후 친제(親祭)를 거행하였다. 또 9월 13일을 길일로 책정한 뒤 종묘 안에 마련한 공성실(恭聖室)에서 친제를 행하고 중국에서 내린 고명을 고하였다. 그리고 백관에게 가자(加資)하고,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를 사면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7년 9월 13일). 9월 17일에는 공성왕후의 관복(冠服) 관련 사실을 태묘에 고하고, 사면령과 가자 등의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9년 9월 17일). 이로써 7년이 넘도록 추진해 온 생모 추숭 작업은 마무리 되었고, 생모를 정식 왕후의 반열에 올렸다.

이제 공빈김씨는 왕후로 불릴 정통성을 부여 받았고, 종묘에 봉안되어 선조의 둘째 적비로서 당당히 제사를 받게 되었다. 광해군은 처음부터 공성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 곧 대군의 신분으로 왕위를 이은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공빈의 추숭은 광해군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무리하게 추진된 것으로 유교적 명분을 크게 훼손하여 왕의 권위와 주동자들의 도덕성에 큰 흠을 남기게 되었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는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공빈김씨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들을 헐도록 하였다. 공성왕후라는 위호(僞號)도 삭제하고, 신주를 김씨 자손에게로 돌려보냈으며, 고명·면복·책보(冊寶)·의장(儀仗) 등은 종묘에 고유(告由)한 다음 모두 불태워 버렸다. 또 성릉이라는 능호(陵號)도 혁파하였다(『인조실록』 1년 3월 18일).

참고문헌

  • 이영춘, 『조선 후기 왕위 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계승범, 「공빈 추숭 과정과 광해군의 모후 문제」, 『민족문화연구』48,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