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지옥(金自點之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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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년(효종 2) 김자점의 역모로 일어난 옥사.

개설

김자점지옥(金自點之獄)은 1651년에 낙당(洛黨)과 산림 세력이 인조 집권 말기부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을 견제하기 위해 탄핵한 사건이다. 효종은 김자점이 인조의 후궁과 결탁한 역모 혐의와 권력 남용 혐의를 문제 삼아 사형 처분을 내렸다.

역사적 배경

인조 정변에 적극 참여한 김자점은 정사공신 1등의 제3위에 책봉되었다. 김자점은 인조가 말년에 효종의 후견인 역할을 당부했고, 효종에게도 그를 잘 예우하라고 당부를 할 정도로 인조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효종실록』 2년 12월 15일). 또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강빈(姜嬪)의 처벌 과정에서 인조를 지원한 덕분에 영의정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효종 집권 초기에 정변 공신인 원두표 등 낙당 세력과 송준길·송시열 등 산당(山黨) 세력의 견제로 수세에 몰렸고 이를 일거에 만회하려던 정치 활동이 정국에 파장을 일으켰다.

발단

인조의 후궁 조소원(趙昭媛)이 사위인 효명옹주의 남편 김세룡(金世龍)과 함께 자신의 소생인 숭선군(崇善君)이나 낙선군(樂善君)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조소원은 효종의 건강 악화를 비는 주술 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었다. 또 조소원의 사촌 조인필(趙仁弼)은 김세룡의 조부인 김자점을 비롯해서 김세창·이두일·정계립·이주·이언표 등을 역모에 가담하도록 설득해 나갔다.

경과

조소원의 효종 저주 행위가 발각되면서 김자점 역모 혐의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이 수원방어사변사기(邊士紀), 광주방어사기진흥(奇震興), 전 절도사안철(安澈), 지사(知事)이형장(李馨長), 전 현감이순성(李循性), 전 군수이효성(李孝性) 등과 역모를 준비했다고 자백했다. 반란군의 대장은 변사기, 책사(策士)는 기진흥, 가담자 포섭 책임은 이형장이 분담하기로 했다고 진술했다. 수원과 광주(廣州)의 병력을 동원해서 경성을 점령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계획은 가담자들이 체직(遞職)되면서 미루어졌다고 진술했다(『효종실록』 1년 3월 4일).

이어서 김자점은 손자며느리인 효명옹주(孝明翁主) 가문과 두 아들의 인맥을 활용해서 역모를 획책했다고 진술했다. 아들 김연(金鍊)은 한산의 병력, 김식(金鉽)은 곡성의 병력을 출동시키고, 기진흥은 경기도의 수군을 동원하고 안철과 이형장은 서울에서 호응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변사기의 북방 전출로 대장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주저하다가 낭패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인조는 조소용은 스스로 목을 매게 하고 효명옹주는 중도(中途)에 안치하고, 숭선군에게는 섬 유배형을 내렸다. 주동자인 김자점·김식·김세룡·변사기·기진흥·조인필·이형장·안철·김정·김세창·이효성·이두일·조성호·정계립 등은 사형에 처해졌다(『효종실록』 3년 3월 4일).

이 사건은 인조의 현실주의 노선을 뒷받침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이 효종이 집권한 후에도 권력을 독점하려 기도하자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야기되었다. 김집·송시열·송준길 등 서인 산림 계열의 김자점을 처벌 주장을 수용해서 벌인 옥사(獄事)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김세봉, 「효종 초 김자점 옥사에 대한 일연구」, 『사학지』34, 2001.
  • 김용흠, 「조선 후기 역모 사건과 변통론의 위상: 김자점 역모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70, 2006.
  • 오수창, 「인조대 정치 세력의 동향」, 『한국사론』13, 1985.
  • 오항녕, 「조선 효종대 정국의 변동과 그 성격」, 『태동고전연구』9,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