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발당인(擺撥唐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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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운영하던 파발 체제의 파발군을 이르는 말로, 좁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의 파발군을 가리킴.

개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당국(唐國)을 비롯해 상국(上國)·천조(天朝)·중조(中朝)·중국(中國)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파발당인(擺撥唐人)은 중국의 파발군 즉 파발아(擺撥兒)를 뜻하는데, 좁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의 파발군을 가리킨다.

담당 직무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 20만명이 불과 2주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위협하자,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는 대군을 파견하기에 앞서 관전보부총병(寬奠堡副摠兵)동양정(佟養正)을 조선에 급파하였다. 그는 6월 11일 의주 의순관에 도착하자마자 조선 조정에 발참의 설치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의주와 평양 사이에 100리마다 1개씩 총 5개의 발참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이듬해인 1593년에는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뒤 평양에 있던 명나라 제독이여송(李如松)이 도성 탈환을 목적으로 평양에서 한양까지 10리마다 발참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의주와 한양을 잇는 파발로가 완성되었다. 명나라 군은 그 후에도 남진함에 따라 발참을 확대해 갔다.

명나라 군대의 파발 조직은 발장(撥長)과 파발아로 구성되었는데, 주로 적세의 정탐 및 보고, 각 진영간의 연락 등을 담당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파발군을 통해 명나라 조정과 연락을 취하였고, 심지어는 그들을 통해 왜군의 동정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파발군은 왜군을 격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발참의 운영과 관리에 따른 백성의 부담, 파발의 왕래가 잦은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 백성의 피해가 컸다. 특히 파발아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는 등의 문제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파발군의 정보 수집 및 전달 속도가 신속하고 효율성이 뛰어나다고 판단하였고, 또 파발당인이 역민(驛民)과 같은 민간 조직이 아니라 군졸로 구성된 조직 즉 파발군 조직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1597년(선조 30)에 파발제를 시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참고문헌

  • 남도영, 『韓國馬政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1997.
  • 남상호, 「조선시대 파발제-군사통신제 발달」, 『韓國軍事史 13』, 경인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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