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통사(倭通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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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일본어 통역 및 대일(對日) 교섭 실무를 담당한 역관.

내용

조선시대 왜학이 설치된 것은 1414년(태종 14) 이후였다. 당시 태종이 사역원에서 자제(子弟)들에게 일본어를 익히도록 명함에 따라, 곧 바로 왜학이 사역원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통사는 중앙과 지방에 파견되었는데, 중앙의 사역원에는 정9품 왜학 훈도(倭學訓導) 2원이, 지방에는 경상도의 부산포와 제포에 종9품 왜학훈도가 2원 파송되어 있었다. 일본과의 외교적 사안이 발생할 수 있는 지역에 왜통사를 파견하는 것은 조선후기에 더욱 확대되어 통영·제주·전라좌수영과 우수영·충청 수영 등지에도 각 1명씩 파견되었다. 동래부 왜관에는 훈도(訓導)별차(別差)를 두어 일본과의 교섭 실무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왜통사는 일본으로 파송되는 통신사행을 수행하거나 문위행(問慰行)으로 대마도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용례

上王以倭通事朴貴不顧父母 欲隨平道全 必有異心 命下義禁府鞫之 杖貴八十 幷其父母同産 沒爲官奴(『세종실록』 1년 6월 14일)

참고문헌

  • 김동철, 「17~19세기 동래부 소통사의 편제와 대일활동」, 『지역과 역사』 17, 2005.
  • 양흥숙, 「17~18세기 역관의 대일무역」, 『지역과 역사』 5, 1999.
  • 홍성덕, 「조선후기 대일외교사행과 왜학역관」,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2권,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