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반사(接伴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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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중국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던 임시 관직.

내용

고려시대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접대소(接待所)를 설치하고, 접반관(接伴官)과 동접반관(同接伴官) 등을 두었다. 접반사(接伴使)의 명칭은 고려 고종대 이후에 시작되었다. 조선태종 초에 원접사(遠接使)로 호칭이 바뀌었다가, 점차 원접사와 접반사로 구분되었다. 원접사는 정2품 이상의 정경(正卿)으로 임명되어 황제의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를 맞이하고, 접반사는 종2품의 아경(亞卿)으로 임명되어 그 밖의 차관(差官)을 접대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사신이 국경에서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와 체류 중 지방으로 나갈 때에만 접대를 담당하고, 한양에서는 영접도감의관반(館伴)이나 제조(提調)등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접사나 접반사가 관반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고, 도성 내에서도 사신과 동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신을 처음 맞이하는 직무의 특성상 예의와 문장이 뛰어나고 풍채가 좋은 인물로 선발되었고, 사신 파견 소식이 전해지면 종사관·통사 등 수행원과 함께 그날로 파견되었다.

왕과 왕비의 책봉 등 간단한 책무를 맡은 칙사와 달리, 구체적 직무가 주어진 차사들의 임무는 다양하여 접반사도 해당 임무에 밝은 관원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1431년(세종 13)에 명(明)의 차사가 국경의 함길도 여진 지역을 시찰할 때 해당 지역 사정에 밝은 이징옥(李澄玉)을 접반사 외에 가정접반사(加定接伴使)로 추가 파견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많은 명의 장수들이 파견되었을 때는 접대도감을 설치하고, 각 장수들마다 접반사와 접반관을 배정하였고, 일본에서 강화 교섭이 진행되던 과정에서는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을 겸하기도 하였다. 광해군대에는 조선 땅에 들어온 명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에게도 접반사를 파견하여 조선 정부의 의견을 전달하며 행동을 제어하였다. 인조대 이후로는 외교의 대상이 청으로 바뀌어 조선의 자발적 외교 노력이 감소하였고, 청 측에서도 사신 접대를 간소화할 것을 지시하여 접반사의 역할도 감소하였다. 때로는 접반사가 문위사(問慰使)를 겸하기도 하고 별견재신(別遣宰臣)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1712년(숙종 38)에는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게 되어 접반사박권(朴權)이 함경감사와 함께 청나라 총관과 협의하여 국경을 확정하였다.

용례

禮曹參判洪暹啓曰 詔使之來 接伴江上 其任最重 不但禮貌之難於得中 設有疑難 問詰往復 難處之事 苟非練達朝典料事周遍者 無以臨機酬酢 尊國體而得彼之歡 是以自祖宗朝 愼選接伴 宰相必擇秩高有名望諳熟善料事者授之(『명종실록』 즉위년 11월 15일)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원사(元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고려도경(高麗圖經)』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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