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暗行御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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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부에서 지방관의 치적과 비리를 감찰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했던 사신.

개설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성종대에 처음 파견되었다. 문어적으로 암행어사를 영화롭게 지칭하여 수의사자(繡衣使者)라고도 한다. 그러나 16세기까지는 암행 감찰에 부정적이어서 암행어사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17세기 이후로 암행어사가 제도화되었는데 암행어사는 주로 젊은 당하관 중에서 선발했다. 암행어사의 징표로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마패, 유척(鍮尺)을 하사했다. 1829년에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암행 감찰은 조선초기부터 가끔 시행되었다. 1416년 강무 지역에 지응사와 찰방을 보내 암행 감찰을 하게 한 기록이 최초이다(『태종실록』 16년 1월 4일). 세종 때까지 이따금 찰방을 암행시켰으나 폐단이 많다는 이유로 잘 시행되지 않았다. 이후 경차관, 행대와 분대, 어사를 암행시키기도 했으나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또한 감찰관이 자기가 맡은 임무 이외에 민간을 돌아다니며 자체적인 탐문 행위를 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순회 감찰은 관찰사의 임무여서 임무가 중복되고 관찰사의 권위를 침해한다는 것, 어사나 감찰관의 순행은 부정을 적발하기보다는 부정을 예방하는 효과가 더 큰데, 암행은 오직 부정의 적발에 치중하고 관료 간의 신뢰를 상하게 한다는 것, 암행어사는 젊고 경험이 적으며 부정을 적발할 뿐 조사할 수가 없고, 적발을 해도 눈에 띄는 세세한 것만 적발할 뿐 깊이 있는 조사를 통한 적발이 곤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암행을 보내도 수령들이 즉시 서로 알려서 효과가 적다는 것도 이유였다. 따라서 차라리 높은 품계의 경차관을 파견하거나 관찰사에게 위임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16세기 들어 공신(功臣), 대신의 자제, 친척, 하수인들이 수령으로 임명되고 수령 임명자의 자질이 크게 저하되면서 암행어사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성종 때인 1485년경이다(『성종실록』 16년 7월 6일). 선조대 이후로는 암행어사가 활성화되어 제도로 자리 잡았다.

암행어사는 승정원, 삼사(三司), 예문관 등 왕과 가깝거나 엘리트 문신을 임명하는 관서의 당하관인 시종관 중에서 삼정승의 추천을 받아 왕이 임명했다. 하지만 모든 암행어사가 같은 경로로 임명되지는 않았다. 암행어사는 아니지만 그 도의 도사를 암행시켜 감찰하기도 했고, 진휼과 같이 다른 일로 파견 나가있던 어사를 암행어사로 전환하기도 했다. 어사의 활동 범위는 보통 한 도였으며 팔도에 동시에 파견하기도 하고 일부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 좌도, 우도 등으로 세분하거나 인접 지역에 중복해서 파견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암행어사에게는 임명장인 봉서, 임무를 지시한 사목, 놋쇠로 만든 자로 형정과 도량형의 검사를 의미하는 유척, 그리고 마패를 지급했다. 명령을 받은 암행어사는 즉시 출발해야 했는데, 봉서에는 남대문 밖에 가서 개봉하라는 명령이 적혀있었다. 암행어사는 암행하며 현지의 실정을 조사하고 관청에 출도해서 서류를 조사하기도 했다. 현지에서 수령을 파면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돌아와서 보고서를 제출하면 그에 따라 조치가 이루어졌다.

암행어사의 보고는 서계(書啓)와 별단(別單), 두 가지가 있었다. 서계는 사목에 따라 탐문한 지방관에 대한 평가 보고서이다. 암행어사는 진재(陳災)나 양전(量田)과 같이 특별한 국가적 행사나 민간의 고통이 있을 때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별단은 사목 이외에 암행 중에 보고 들은 폐단에 대한 보고서이다. 일반적인 사신은 임무 이외에 출장길에 보고 들은 민폐를 보고할 수 없다. 그러나 어사는 예외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어사는 자기 임무가 아니라도 왕래하는 길에 보고 들은 민폐를 보고해야 했다. 어사는 감찰 후 왕과 면대해서 감찰 내용을 직접 진술하기도 하고, 경연(經筵)에 참석해서 민간의 문제점을 보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별단을 만들어 광범위한 보고를 했다. 행정 구역의 개편, 제도 개정, 대동법과 같은 새로운 제도의 시행 사항을 건의하기도 했다.

변천

암행어사는 백성들에게 상당한 기대와 정부에 호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암행어사로 인해 많은 수령이 파면되었고, 암행어사에 대한 소문이 돌면 수령들이 조심하고 특정 업무에 더욱 전념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암행 감찰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어사들은 문신 관료들이어서 암행과 위장에 서툴렀다. 조선시대는 여행객이 많지 않아 대도시가 아니면 이유 없이 여행하는 선비는 금세 눈에 띄었다. 손님을 많이 접대하는 상인이나 기생들은 암행어사를 어김없이 알아챘다고 한다. 암행에 성공해도 한 번 출두하면 주변 고을로 소문이 퍼졌다. 도로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주변 고을에서는 어사가 오는 길과 시간을 예측할 수 있어서 서리와 관속이 길과 주막을 지키고, 심한 경우는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 적도 있었다. 젊은 문신이 세도가나 권문세가와 줄이 닿아있는 수령을 적발하기도 쉽지 않았다. 암행어사가 힘없는 음관 수령만 적발하고 현달한 문벌가 출신의 수령은 열에 한 명도 적발하지 않는다고 왕이 불평하기도 하고, 교서로 내리기도 했다.

가짜 암행어사도 출현했다. 이미 선조 때부터 가짜어사가 지방관을 우롱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런 사건이 의외로 많았다. 진짜 어사가 가짜 어사로 몰려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폐단에도 불구하고 『성호사설』에서 “농촌과 백성의 실상을 알아내고 탐관오리를 적발하는 데는 암행어사만한 방법이 없다.”고 언급한 것처럼 암행어사 제도는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으며 조선후기에는 대표적인 지방 감찰제도가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인재집(麟齋集)』 「남행록(南行錄)」
  •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
  • 『수의록(繡衣錄)』
  • 『서수일기(西繡日記)』
  • 『암행일기(暗行日記)』
  • 강석화, 「1812년 함경도 암행어사의 활동」, 『인하사학』 10, 2003.
  • 곽동찬, 「고종조 토호의 성분과 무단(武斷) 양태: 1876년 암행어사 토호별단(土豪別單)의 분석」, 『한국사론』 2, 1975.
  • 김명숙, 「조선 후기 암행어사 제도의 일연구: 고종 5년(1868)의 서계(書啓)·별단(別單)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15, 1987.
  • 임병준, 「암행어사 제도의 운영성과와 한계」, 『법사학연구』 2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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