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장(水精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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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을 캐거나 수정으로 공예품을 제작하는 장인.

개설

조선시대에 수정장(水精匠)은 1427년(세종 9)에는 장색에 있었으나, 불미스러운 일로 한 번 등장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자료가 없다. 수정을 캐거나 수정으로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일은 주장(珠匠)이나 번주장(燔珠匠)옥장(玉匠)이 대신했을 것이다.

담당 직무

수정장은 수정의 생산지에서 수정을 캐거나 수정으로 공예품을 제작하는 일을 하였다. 첫째, 조선전기에는 과천·수원 등지에서 백옥을, 경주에서 마노를 채취하였다. 1490년(성종 21)과 1503년(연산군 9) 과천 관악산에서 백옥 네 덩이를 캤다(『성종실록』 21년 7월 22일). 경주에서는 마노를 캤으며(『연산군일기』 10년 7월 13일), 양양에서는 수정을 캐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9월 18일).

이러한 옥석은 경기도 남양, 충청도 남포, 경기도 장단을 비롯하여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20여 개 읍에서 채취하였다. 이들 지역의 옥이 품질이 우수하거나, 바닷가나 강가에 위치하여 채취한 옥석의 운반이 편리했던 때문이다.

둘째, 수정장은 왕의 행차 시 대가(大駕)의 노부(鹵簿)에 사용되던 의물을 제작하였다.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된 수정장은 나무로 자루를 만들고, 은(銀)으로 이를 싼 것이다. 그 위의 끝에는 목정주(木精珠)를 걸고 도금한 철사로써 굴곡하여 수정주(水精珠)의 사방에 걸어서 불꽃과 모양을 같게 하였다. 한편 세종대 제정한 의장 제도에서 길의장(吉儀狀)에 가수정장(假水精杖)을 왼편에 세우고 금월부를 오른편에 세우게 하였다(『세종실록』 4년 9월 6일). 이를 통해 왕권을 상징하였다.

변천

1427년에 수정장 장지(張智)가 사건에 연류되어 직첩을 회수했던 기록 외에는 더 이상 자료가 없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