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수(根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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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이 대궐을 출입하거나 지방으로 출장 갈 때 수종(隨從)하며 시중드는 일을 담당하였던 노자(奴子).

내용

근수(根隨)는 개인이 직접 거느렸던 사노비와 관직에 따라 지급되었던 공노비를 총칭하는데 규정에 따라 수가 제한되었다. 특히 종친과 조관들의 근수가 궁궐과 관사를 출입하는 데 제한적이었다. 1399년(정종 1) 사헌부의 시무책에 따라 근수하는 사람은 궁궐과 관사에 출입할 때 『경제육전』에 따라 그 수를 제한하고, 들어갈 때도 병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의 출입을 막지 못한 자는 각 관사에서 처벌되었다. 1411년(태종 11) 태종은 여러 신하가 직급에 따라 정해진 근수의 수를 따르지 않아 궐내에 잡류의 출입이 빈번하다 하여 재상(宰相)의 근수는 2명, 3품·4품은 1명으로 하고, 5품·6품 이하는 없애게 하였다.

한편 종친에 대한 근수의 제한 규정은 별도로 마련되지 않고 『속육전』의 관품(官品)에 따른 근수 규정에 따라 운영되었다. 그러나 종친과 신료들이 근수를 지나치게 많이 거느리고 다님에 따라, 1451년(문종 1)에 종친에 대한 근수를 정하여 대군은 5명, 왕자는 4명, 나머지 종친은 품계에 따라 2품 이상 3명, 3~4품 2명, 5~6품 1명으로 규정하였다. 이후 『경국대전』 「형전」 근수(根隨)조는 왕자와 종친과 관리의 등급에 따라 궐내에서 거느릴 수 있는 근수의 수를 1~4명으로 제한하였고, 궐 밖에서 거느릴 수 있는 근수의 수는 3~13명으로 제한하였다. 1417년(태종 17) 5·6품의 대간(臺諫)은 원래 근수를 거느리지 못하였는데, 비와 눈이 오는 날에 대간이 조회에 참여할 때 더러운 신발로 대궐로 들어온다는 이유로 특별히 근수 1명을 거느리도록 허락받기도 하였다. 또한 1456년(세조 2)에는 5~9품의 관료는 문서(文書)나 우구(雨具)를 운반하는 근수 1명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근수에게는 궁문을 출입할 때 신원을 증명하는 신부(信符)가 지급되었다. 문무반 근수의 신부는 모관근수(某官根隨)라고 적고, 전함(前銜) 2품 이상의 근수는 모관성 근수(某官姓根隨)라고 적고, 현직(現職)에 있고 전함이 3, 4품의 근수는 모직 성명근수(某職姓名根隨)라고 적었다.

용례

傳旨議政府曰 宗親朝官有根隨 所以給使令也 比聞有不率本人 而收其直者 此非根隨設立本意 祇長貪黷之風 其曉諭諸司 使勿如是 以勵廉恥(『성종실록』 21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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