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관(講學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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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위 계승자인 원자나 원손의 교육을 위해 설치한 강학청의 관원.

개설

왕의 후계자인 원자(元子)나 원손(元孫)이 태어나면 원자·원손을 보호하고 그들의 양육을 담당하기 위해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였다. 원자·원손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서너 살이 되면 원자·원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였는데, 강학관은 강학청의 관원이다.

담당 직무

강학청은 조선시대 왕의 맏아들인 원자나 맏손자인 원손의 교육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서인데, 강학관은 여기에 소속된 관원이다. 원래 원자나 원손이 태어나면 양육과 보호를 위해 보양청을 설치하고 보양관을 두었는데, 이 보양관이 강학관이 되었다. 원자나 원손이 글을 읽을 때가 되면 보양청이 강학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원자를 보호하기 위한 관서를 두었는데, 태종 때의 경승부(敬承府)가 이에 해당하는 원자부(元子府)였다. 태조 때에는 세자관속만을 두었지만 원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체계적으로 관리된 것이다.

선조 때에 원손의 강학관을 뽑는 일에 대해 논란이 있었으므로 늦어도 선조 이전에 강학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38년 4월 29일). 그런데 이 당시에는 원손강학관이 전임관이 아니라 겸관(兼官)이었다(『선조실록』38년 5월 15일). 원자강학관은 인조 때에 등장하였으며, 최초의 원자강학관에는 산림 출신인 김장생(金長生)이 제수되었다.

강학관의 품계나 관원 수는 대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원자의 경우에는 정1품 이하에서 종2품 이상 3명이, 원손인 경우 종2품 이하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2명이 보양관이 되었고, 이들은 뒤에 강학관이 되었다. 다만 관원들의 지위에 따라 당상관의 경우 강학관으로, 당하관의 경우 시학관(侍學官)으로 불렸다(『인조실록』6년 7월 29일).

변천

강학관은 조선 전기에는 없다가 선조 때에 처음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때 강학관은 강학청에 소속된 관원이 아니라 개별적인 존재로서 원손강학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첫 원자강학관은 김장생이며, 이후 산림 출신이 주로 강학관이 되었다. 이점은 사림 인사에 대한 왕실과 조정의 평가가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 『續大典』
  • 『大典會通』
  • 『侍講院志』
  • 육수화, 『조선시대 왕실 교육』, 민속원, 2008.
  • 정재훈, 「세종의 왕자 교육」, 『한국사상과 문화』3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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