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우후(兵馬虞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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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의 서반 외관직.

개설

1466년에 병마도절제사도진무(兵馬都節制使都鎭撫)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던 종3품의 서반 외관직이었다. 병마절도사를 보좌하여 도내의 군사 전반을 처리하였던 관계로 아장(亞將)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병마절도사의 부재 시에는 그를 대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전기에는 경기·강원·황해도 등 중부 지방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후기로 들어서면서 황해도에도 수군우후와 함께 두었는데, 이는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담당 직무

1466년(세조 12) 병마도절제사도진무를 개칭하였던 서반 외관직으로 품계는 종3품이다.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막료로서 병우후(兵虞候)로 간략하게 부르기도 하고, 주장(主將)에 버금간다고 하여 아장이라고도 했다. 전신인 도진무가 병마도절제사 휘하의 진무소(鎭撫所)를 맡아 군사의 지휘, 군수 물자의 관리 등을 담당했는데,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조선전기에는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 중부 지방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군사 관련 업무가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방위상에도 요충지가 비교적 적었던 탓으로 보인다. 그런데 설치 지역 가운데 함경도와 평안도 등 양계의 경우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그 격이 높았다. 특별히 양계의 우후에게는 일찍부터 녹봉을 지급하였으며 그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성종실록』 2년 2월 30일). 임기는 2년이었다.

도내의 군사 관련 업무를 처리했는데, 병마절도사를 대신하여 여러 고을을 순행하면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중 병력 동원을 명하는 신표였던 발병부(發兵符)의 경우 지방 지휘관들이 항상 보관했다가 본인의 사망이나 상(喪)을 당해 공무를 행하기 어려우면 절도사에게 인도해야 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우후로 하여금 대신 처리하게 했다. 또한 지방 군사들이 서울 등지로 번상했을 때에는 우후나 군관(軍官) 가운데 1명으로 하여금 반드시 거느리게 했다.

변천

『경국대전』에 따르면 충청도에 1명, 경상좌·우도에 각각 1명, 전라도 1명, 영안북도(永安北道: 현 함경북도) 1명, 평안도에 1명을 두었다. 『대전회통』에 이르러 황해도에 1명을 더 두었다. 이에 앞서 정조 때 황해도수군절도사가 중군(中軍)은 단순한 편비(編裨)에 불과해 사람이 변변치 못하고 지체는 미약하므로 아랫사람들을 장악하기 어렵다며 우후를 신설하여 경력이 있고 지체와 명망을 갖춘 자를 임명해서 보내줄 것을 청하여 받아들여졌다(『정조실록』 18년 3월 21일). 그리고 얼마 뒤 병마사가 우후를 동원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정조실록』 24년 5월 6일), 비슷한 시기에 병마우후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황해도에서도 군사에 관한 업무가 늘어났으며 또 중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원·황해도의 중군과 평안도의 병우후 및 함경남〮북도의 우후, 상토(上土)·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등의 근무 경력은 영장(營將)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규정으로 미루어 여전히 양계와 그 나머지 도 사이에 격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김순남, 「진관체제의 확립과 지방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
  • 오종록, 「조선초기 병마절도사제의 성립과 운용(상)」, 『진단학보』 59,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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