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당(伴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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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공신(功臣)·당상관들을 수행하는 호위병.

개설

반당(伴倘)의 반(伴)은 ‘짝’을, 당(倘)은 ‘무리’를 뜻하는 것으로, 반당은 ‘동반하는 무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당은 흔히 반인(伴人)·반아(伴兒)·반종(伴從)이라고도 했다. 1408년(태종 8) 여러 군(君)·왕의 사위[駙馬]·공신 등에게 10명씩 배정해주기 시작했으며, 제도로 정비된 것은 『경국대전』에 이르러서였다.

『경국대전』「병전」에는 “병조(兵曹)에서 왕에게 아뢰어 임명하되 황해도·평안도·영안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임명하지 않는다. 반당을 받은 사람이 죽으면 3년 후에 다른 직역으로 이정한다. 종친·공신·위(尉)·부위(副尉)는 아내가 살아있을 경우 아내에게 주고 그 반당이 죽으면 보충하지 않는다. 환관은 품반당(品伴倘)을 받을 수 없다. 그 정원은 대군 15명·왕자군 12명, 1품 9명·2품 6명·3품 당상관 3명, 1등공신 10명·2등공신 8명·3등공신 6명으로 한다.” 하고 되어있다.

반당은 호위병이라 하더라도 국방 체제의 기본 구조인 오위(五衛) 체제에 속하지 않고 개인에게 속해있었기 때문에 잡류적인 존재로서 국가의 기간(基幹)이 되는 병사는 아니었다. 이들은 조선 양반 사회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양인의 노동력을 징발한 특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담당 직무

1) 반당의 설치와 종류

반당이 언제부터 출현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칭호는 고려말부터 나타난다. 반당은 고려말 혼란한 정세를 틈타 중앙의 고관(高官)에게 투탁(投托)하거나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직속되어, 그들의 임무를 보좌하고 숙위(宿衛)나 기종(騎從)을 담당하던 존재로서 사병(私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 직후 이들은 국가의 안정과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되었다. 『경국대전 주해』에서는 반당에 대하여 “고려 사병의 폐단을 혁거(革去)하고 반당을 설치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1400년(정종 2)에 사병을 혁파하고 난 후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08년(태종 8)에 부마와 군, 삼공신의 반당 수를 10명으로 정하였다. 사병을 혁파하여 그 폐단을 제거한 뒤 새로운 방편으로 반당을 설치한 것이다. 반당은 사병적 기종자(騎從者)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하에서 지급된 개인의 호위병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성격으로 『경국대전』에서는, 국왕이 대열(大閱)을 거행할 때는 잡색군(雜色軍)과 함께 오위에 배속되도록 규정되었다.

이후 1428년(세종 10)에 다시 개정되어 ‘대군 20명, 왕자 10명, 봉군종친 7명, 원윤(元尹) 3명, 상공주부마(尙公主駙馬) 10명, 상옹주부마(尙翁主駙馬) 7명, 좌우의정(左右議政) 10명, 공신제군(功臣諸君) 10명, 시산(時散) 2품 이상 5명,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이상 3명’으로 규정하였다. 이때에는 종친들 내에서도 그 지위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되었으며, 공신·군 외에 관료들까지 지급 대상이 크게 늘어났다. 『경국대전』의 반당을 지급받는 대상자와 그에 따른 반당의 정원은 세종대에 크게 개정된 내용과 이후 공신 책봉 시 지급된 공신반당의 정원을 기준으로 해서 정해졌다. 『경국대전』에는 ‘대군 15명, 왕자군 12명, 1품 9명, 2품 6명, 3품 당상관 3명, 1등공신 10명, 2등공신 8명, 3등공신 6명’씩 지급하도록 법제화되었다. 국가에서는 반당이라는 이름하에 수천 명에 달하는 양정(良丁)들을 상위의 특권적 지배층에게 지급하였던 것이다.

반당은 그 주인에 따라 ‘종친반당’, ‘공신반당’, ‘품반당’ 등으로 구성되었다. 종친반당은 본래 종친들을 호위하고 이들이 궁중을 수시로 출입하는 데 대비하기 위하여 그 지위와 종친계(宗親階)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한 반당이다.

공신반당은 왕의 집권 과정에서 수고한 공신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 등급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한 반당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공신 책봉은 많은 공신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많은 수의 공신반당을 낳았다.

품반당은 당상관 이상을 특별히 우대할 목적에서 그 품계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한 반당이다. 그런데 반당을 지급 받은 사람들은 관료·공신 등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두세 차례 거듭 공신에 책봉됨으로써 한 개인이 많은 반당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환관은 품반당을 받을 수 없었는데 이들이 조관(朝官)이나 유사(儒士)들에 비해서 천시되었기 때문이다.

2) 반당의 직무

반당은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종친, 공신, 당상관 이상의 고급 관료들을 호위해야 했다. 반당은 대군이나 왕자군을 비롯한 당상 이상의 종친과 공신 및 당상관들에게 그들의 신변 안전과 우대를 목적으로 호위병으로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반당은 서울에 사는 한량인(閑良人) 또는 양인 가운데 역이 없는 사람[無役人]으로 임명하였다. 반당은 특정한 개인에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적인 성격을 많이 띠고 있었으나 법적인 면에서는 국가의 공인이었다. 따라서 그 관할은 병조 아래의 승여사(乘輿司)에서 담당하였다. 국가는 차첩(差帖)과 반안(伴案)에 의해 반당을 파악하고 점고(點考)를 통하여 통제하였다. 반당은 병조에서 인정한 차첩을 소지함으로써 그 신분을 증명받았고, 그들의 명부인 반안에 등록되었다.

반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주인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반당은 강무(講武)행행(行幸) 때 주인을 따라가며 보호하였다. 또한 반당은 국가의 비상시 주인을 수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반당은 주인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주인의 요구에 따라 충성과 보호를 위한 잡다한 심부름을 하였다. 반당은 주인의 권세나 위엄 있는 권위를 상징하였다. 이들은 호위병, 수종인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힘과 지략, 지위를 가진 자들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 반당의 폐단

반당은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과의 사이에 강한 예속성을 띠었다. 공신들은 반당을 자기 집의 사적인 소유물같이 여겨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증여하기도 하였다. 반당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종친·공신 및 상신(相臣)들의 권력을 배경으로, 권력 발휘의 수족처럼 부려지거나 완력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반당들은 지방에서 마구 행패를 부리는 한편 주인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늘리거나 주인의 세력을 믿고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당은 자신이 맡은 일을 잘 수행하지 않으면 엄한 처벌을 받았다.

변천

반당에 대한 대우는 다 같지 않았다. 세종 초부터 반당에게 체아직(遞兒職)이 주어졌는데 반드시 차첩을 심사한 후 제수하였다. 공신반당은 경우에 따라 체아직 6품까지 제수되었다. 반당 가운데 체아직을 받은 자는 취재(取才)에 의하여 정직(正職)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당의 체아직은 1484년(성종 15)에 혁파되어 경제적 대우가 없어지고, 다만 산직(散職)으로서 종8품에 10명, 종9품에 50명이 임명되었는데 일 년에 두 번 1월과 7월에 번갈아가면서 임명되었다. 산직을 받는 반당은 대군과 왕자군·부마 및 공신에게 소속된 자들이며, 품반당에게는 산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반당은 경제적으로 과전법 체제가 무너지고 농장이 발달하는 등의 변동에 따라 15세기 후반부터 농장 관리인 또는 농장 경영인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토지 소유의 집중이 심화되고 이를 관리할 사람이 많이 필요하자 반당을 지급받은 사람들은 일부 반당에게 농장의 경영·관리·감독을 맡겼다. 이를 빌미로 법을 어기며 남의 재산을 빼앗는 모점(冒占)과 투탁에 의한 가짜 반당 즉 가반당(假伴倘)이 증가하였다.

반당과 가반당의 수가 계속 늘어나 군역 부담자가 줄어드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에 영조는 반당의 인원을 1/3로 줄여, 『속대전』에서는 대군은 15명에서 5명으로, 왕자군은 12명에서 4명으로, 1품은 9명에서 3명으로, 2품은 6명에서 2명으로, 3품 당상관은 3명에서 1명으로, 1등 공신은 10명에서 3명으로, 2등 공신은 8명에서 3명으로, 3등 공신은 6명으로 2명으로 축소하는 한편 이전에 규정이 없던 4등 공신에게 1명을 배정하도록 규정하였다. 고종대에는 반당을 혁파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한희숙, 「조선 초기의 반당」, 『역사학보』 112, 198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