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房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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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상궁들의 사사로운 잔일을 맡았던 여종 또는 지방관청의 사환.

개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 나인[內人], 무수리[水賜], 방자, 의녀(醫女), 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범주에 속하였다. 궁녀는 경력에 따라 품계가 달랐으며, 품계가 같더라도 소속된 처소와 맡은 직책에 따라 격이 달랐다.

지방관청의 방자는 관청의 사환이었다. 이 가운데 경주인방자(京主人房子)는 경주인이 관할 읍에 발송하는 공문·통신 등을 전달하는 하인을 일컫었다.

담당 직무

궁녀는 내명부(內命婦)의 품계를 받은 여관(女官)과 품계를 받지 못한 천비(賤婢)로 나뉘었다. 여관에는 나인과 상궁이, 천비에는 방자와 무수리 등이 있었다. 궁녀는 일반적으로 양가(良家)의 딸보다는 각사(各司)에 속해 있던 여종 가운데 뽑았다. 왕 측에서는 가급적이면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고 싶어 했기 때문에 양가에서는 딸을 일찍 시집보내는 조혼(早婚)의 풍습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종 때부터는 양가의 딸을 뽑지 못하게 하였다.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는 궁녀를 각사의 여종 중에서 뽑아 들이도록 규정하였다. 방자의 경우에는 관속(官屬)이나 입궁한 나인의 친척 중에서 뽑았다.

궁중의 방자는 원래 처녀들만 채용하였다. 그들은 머리를 땋아 늘였고 보통 평복에 쪽을 찍었으나, 복색에 옥색(玉色)·백색·황색·다홍색·자주색은 금지되었다. 옥색·백색은 궁중에서 국상(國喪) 때 입는 복제 색이었고, 황색·다홍색·자주색은 왕비나 공주의 복식에 쓰는 색이기 때문이었다.

궁궐의 방자 중에는 ‘글월 비자’가 있었다. 이들은 색장나인(色掌內人) 밑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문안 편지를 돌리는 등 바깥 근무를 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상궁의 사사로운 잔일을 맡았다. 상궁들은 궁중에 자기만의 처소가 있었는데, 상궁이 직접 살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방자에게 모든 일을 시켰다. 방자는 시간제로 부리는 반(半)방자와 붙박이로 부리는 온방자로 나뉘었다. 반방자는 일종의 시간제 파출부라고 할 수 있고, 온방자는 그곳에서 먹고 자는 식모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급료는 국가에서 지급하였는데, 이들의 보수도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1470년(성종 1)에 방자는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5명, 왕대비전(王大妃殿)에 7명, 대전(大殿)에 12명이 배속되었다(『성종실록』 1년 2월 6일). 영조·정조대 호조(戶曹)에서 왕실의 각 궁(宮)·전(殿)과 중앙 각사 등의 재정 용도를 규정한 『탁지정례(度支定例)』에는 자전(慈殿)에 23명, 중궁전(中宮殿)에 13명, 세자궁(世子宮)에 16명, 세자빈궁(世子嬪宮)에 15명, 원자궁(元子宮)에 16명, 원자빈궁(元子嬪宮)에 16명, 세손궁(世孫宮)에 15명, 세손빈궁(世孫嬪宮)에 15명이 배속되었다.

변천

방자는 조선시대 궁궐이나 관청에서 말단 심부름이나 허드렛일을 담당하였던 하층 노비로서 왕실의 유지와 행정 업무 등의 필요로 인해 왕조말기까지 존속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도지정례(度支定例)』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김용숙, 「이조 후기 내인 생활 연구: 실지 수집을 주로 하여」, 『아시아여성연구』3, 1964.
  • 이영숙, 「조선 초기 내명부에 대하여」, 『역사학보』 96, 1982.
  • 홍순민, 「조선시대 궁녀의 위상」, 『역사비평』 6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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