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문(建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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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명(明)나라 혜제(惠帝) 대에 사용한 연호로(1399년~1402년), 조선(朝鮮)에서는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이 사용한 연호.

개설

중국 명나라의 제 2대 황제인 혜제가 사용한 연호로(1399년~1402년), 혜제는 연호인 건문(建文)을 본 따 건문제(建文帝) 혹은 건문 황제(建文皇帝)라고도 불린다. 건문 연간동안 혜제는 중국 각 지방 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조선에서는 정종원년부터 태종2년까지 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건문 연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태조실록(太祖實錄)』태조7년(1398년) 12월 22일자로, 이듬해부터 건문을 연호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리는 기사이다. 조선은 개국 때부터 독자 연호 대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정종과 태종대에 건문 연호는 연대(年代)를 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1399년에 훗날 명나라의 제 3대 황제가 되는 성조(聖祖)가 <정난의 변(靖難之變)>을 일으켰다. 이후 성조의 군대는 황제군과 3년 간 격전을 벌였고, 1402년 드디어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하였다. 이때 황궁에 불이 났는데, 이후 혜제의 행방이 불분명해지면서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떠돌게 되었다. 당시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 난징을 탈출하여 양자강에 투신하였다는 이야기, 도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궁을 탈출한 후 승려가 되어 중국 곳곳을 유람하다가 정통(正統)5년인 1440년 신분이 알려졌고, 그리하여 영종(英宗)의 보호 아래 베이징(北京)에서 살다가 5년 후인 1445년에 사망하였다는 이야기이나, 이 또한 분명한 근거는 없다. 한편 혜제에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성조는 건문 연호를 없애버리고, 혜제를 서인(庶人)으로 강등하였다. 이후 건문 연간은 ‘혁제 연간(革除年間)’으로 지칭되었으며, 혜제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은 건문 연호의 ‘건’을 따서 혜제를 ‘건서인(建庶人)’이라 불렀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건문 연간을 ‘혁제 연간’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성종실록(成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명사(明史)』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