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開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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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요(遼)나라의 성종(成宗) 대에 사용한 연호(1012년~1021년).

개설

중국 요나라의 제 6대 황제인 성종이 사용한 3개의 연호 가운데 2번째 연호이다(1012년~1021년).

성종 시기는 중앙집권체제 확립 및 영토 확장 등 대내 · 외적으로 요나라의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한편 당시 중국 대륙에 세워져 있던 송(宋)나라는 중국을 통일시키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두 국가 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1004년에 <전연(邅淵)의 맹약(盟約)>을 맺으며 동아시아의 정세는 안정되었다.

고려(高麗)에서는 현종(顯宗)3년(1012년)부터 현종6년(1015년)까지 개태(開泰)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이후 친송파가 실권을 잡으면서 다시 송나라의 ‘대중상부(大中祥符)’와 ‘천희(天禧)’를 연호로 사용하였다. 이런 가운데 요나라는 개태 연간이 현종9년(1018년)에 고려를 침범하였으나, 강감찬(姜邯贊) 등의 활약으로 패퇴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2년(1722년) 12월 1일자 기사에 개태 연호가 등장한다. 즉 조선(朝鮮)이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자력을 키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개태 연간의 고려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경종실록(景宗實錄)』
  • 『요사(遼史)』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