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畵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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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로 제작된 합(盒).

개설

조선시대에는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와 관련한 공식적인 기록이 많이 있다. 1450년(문종 즉위)에는 명나라 사신 정선(鄭善)이 청화백자 종자(種子) 6개와 화합(畫榼) 2개 등을 바쳤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5일) 정선이 바친 이 기물은 황제의 하사품이 아닌 중국 사신 개인의 진상품으로 황제의 하사품과 비교하면 품질에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연원 및 변천

합은 삼국시대의 청동기 그릇 유형과 비슷한 유형으로 제작된 흔적이 있다. 합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보급되면서부터이다. 불교문화의 확산으로 수요가 늘어난 부처의 진신사리 합을 비롯해 불교 장례 문화인 화장이 성행함에 따라 유골함으로 사용된 골호(骨壺)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청자의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고급 생필품 용기로 제작되었다.

조선전기에는 합이 분청사기로도 제작되었는데 분청사기 합의 뚜껑은 반원의 둥근 형태인 경우가 많다. 조선후기에는 정조 이후에 원형으로 된 합 외에 각형인 사각합도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2층 이상의 찬합 형태도 제작되었는데, 이들은 2층 혹은 3층으로 원형과 각형 모두 제작되었다. 당시 인기 품목인 삼층합의 경우 일본과 중국의 합과 비교해서 기술이 떨어졌음을 논박한 기록이 남아 있어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방병선, 『조선 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김영미, 「朝鮮時代 官窯 靑磁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조순자, 「청자합 제작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