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刀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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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刀)와 검(劍)을 아우르는, 병기로 사용되는 칼.

개설

도검(刀劍)은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와 양쪽에 날이 있는 검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으로 줄여서 검이라고 한다. 검은 『설문(說文)』에 “사람이 차는 병기이다.”고 하였다. 무기로 사용되는 검은 돌칼인 석검(石劍)에서 시작하여 청동검, 철검(鐵劍) 순으로 발달하였다. 철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양날의 검은 길이가 짧은 단검에서 긴 장검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양날의 검이 외날인 도로 대체되었다. 곧고 긴 양날의 검은 잘 부러졌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쪽에만 날을 세우고 한쪽은 두터운 등을 만들어 부러짐을 막고자 한 것이다.

도의 출현은 사용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 찌르기나 내려치기 위주에서 베기 위주로 바뀐 것이다. 그 후 한동안 검과 도는 함께 사용되었고, 양날과 외날의 구분 없이 검 또는 도를 혼용하여 썼다. 따라서 도검은 칼날의 외형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칼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무기로서의 칼은 점차 도의 형태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인류 최초의 무기인 창이 원거리 무기였다면, 칼은 근거리 무기로써 발달하였다. 인류가 칼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약 50만 년 전인 구석기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측된다. 돌에 날카로운 날을 내어 사용한 것이 칼의 원조다. 이 소박한 돌칼을 좀 더 날카롭고 길며 가늘게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중석기시대에 들어선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마제(磨製) 석검이 등장하였다. 당시 석검이라고 불린 돌칼은 자르기와 찌르기의 두 가지 용도에 따라 형태가 발달하였는데, 자르는 형태보다 찌르는 형태가 다목적이고 사용이 편리하였다. 무기로서의 돌칼은 바로 가벼워 찌르기 편한 휴대용으로 발달한 것이다.

마제석검은 단순히 무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제정(祭政) 일치 사회에서 주제자(主祭者)의 상징물로 인식되었다. 집단생활을 하고 원시 신앙의 제의(祭儀)가 행해지면서 칼은 통솔자이자 제사의 주재자이기도 한 사람의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마제석검은 신석기시대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청동 검의 영향을 받아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10세기 청동기 문화가 전해지면서 청동으로 만든 검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청동기의 전래와 함께 청동으로 만든 검·모(矛)·화살촉 등이 들어왔다. 이때 들어온 동검(銅劍)은 30㎝ 내외의 단검이었는데, 종래의 석검에 비해 날이 긴 것이 특징이다. 동검은 처음에는 일명 비파형 또는 만주형으로 불렸던 요령식이었으나 나중에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이 발달하였다.

요령식 동검은 검신(劍身)과 자루를 따로 만들어 끼우는 형태로, 검신과 자루를 한 번에 주조하던 중국식과는 다르다.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사용되던 요령식 동검은 우리나라 동검의 원형이 되고 그것이 변하여 세형동검이 되었다. 세형동검은 검신이 좁고 길어 마치 말레이시아 원주민의 무기인 크리스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세형동검은 우리나라 전역의 토광묘(土壙墓)·석관묘(石棺墓)·지석묘(支石墓)에서 많이 발견된다. 요령식과 세형동검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나 더러는 나무나 돌, 철로 만든 것도 있다. 이것들은 실용보다는 종교적 의식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검을 대표하는 도씨검(桃氏劍)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전주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도씨검은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검이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철기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특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종래 양날의 검이 외날의 도로 전환된 점이다. 이후 우리나라의 칼은 검이 아닌 도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 종래의 칼과는 달리 1m 내외의 장도(長刀) 비중이 크게 늘어난 점이다. 기원후를 전후하여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철제 칼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칼은 곧고 긴 대도(大刀)이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대도는 칼 몸의 중간에 길게 금이 나 있는 호대도(鎬大刀)와 호가 없이 평평한 평대도인데, 평대도가 호대도보다 많다. 칼끝은 뾰족한 것과 일직선인 것이 있고, 칼등은 평편하게 직선인 것과 약간 휜 것이 있다. 삼국시대 전기의 칼은 몸이 넓고 길며 무거웠으나 중기 이후로 제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차차 좁고 날씬하며 가벼워졌다. 중기 이후에는 칼을 호화롭게 장식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는데 주로 칼자루와 칼집에 많은 장식을 하였다. 자루에는 금실이나 은실을 감기도 하였다.

또한 칼자루의 끝인 파두에 특별히 신경을 썼는데 그 모양에 따라 환두대도(環頭大刀), 방두대도(方頭大刀), 규두대도(圭頭大刀), 소환두대도(小環頭大刀) 등으로 나뉜다. 환두대도는 자루 머리가 큰 고리 모양이고 거기에 여러 가지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조각하였다. 조각의 문양에는 쌍룡문(雙龍紋), 단룡문(單龍紋), 단봉문(單鳳紋), 삼엽문(三葉紋), 삼계문(三繫紋) 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칼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칼은 남자들이 몸에 지니는 필수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시대의 칼 중에는 외국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칼도 많다. 1972년 경주 계림로의 고분에서 발견된 보검은 페르시아의 검이다. 또한 칠지도(七支刀)와 같이 백제의 칼이 일본에 전해진 사례도 확인된다. 이 밖에 당시 칼 중에는 사곡검(蛇曲劍)이 있는데, 칼 몸이 마치 뱀이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형태로서 그 용도는 알 수가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칼은 더욱 발전했을 것으로 보이나, 현존 유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일본의 정창원(正倉院) 유물에서 그 예를 볼 수 있고, 나라[奈良] 시대 이후 환두대도를 고려검(高麗劍)이라고 기록한 사례에서 한일 간의 교류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유물 중에도 검은 거의 없다. 다만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문을 지키는 장교들은 검을 찼는데 그 모양이 길고 날이 예리하다. 칼자루는 백금과 검은 쇠뿔을 상감(象嵌)하고 물고기 가죽으로 칼집을 만들었으며 옥 등으로 장식했는데, 이는 옛날의 유습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전투용이기보다는 의장용(儀仗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의 칼은 크게 운검(雲劍)과 패검(佩劍)으로 대표된다. 그 같은 사실은 『세종오례』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서 잘 확인된다. 운검은 칼집을 어피(魚皮)로 싸고 주홍색 칠을 한다. 백은(白銀)으로 장식하며 홍도수아(紅度穗兒)를 드리우고 가죽 띠를 사용한다. 패검은 우리나라 말로 환도(環刀)라 한다. 제도는 운검과 같은데 검은색 칠을 하고 황동으로 장식을 하고, 홍도수아를 드리우며 녹비(鹿皮) 띠를 사용한다.

환도는 칼날이 곧고 짧아 급할 때 쓰기가 편리하다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군기감(軍器監)에서 만드는 환도의 길이가 같지 않은 폐단이 야기되었다. 그러자 1451년(문종 1)에 군기감에서 만드는 칼 중 보병이 쓰는 환도는 길이 1척 7촌 3푼, 너비를 7푼으로, 또 마병(馬兵)이 쓰는 환도는 길이 1척 6촌, 너비를 7푼으로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도록 하였다. 다만 자루[柄]의 길이는 마병은 한 뼘 세 손가락[一掌三指]으로 하고, 보병은 두 뼘[二掌]으로 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 장검이 있다. 날은 길이가 2척 5촌이고, 자루는 나무를 사용하는데, 길이가 5척 9촌이다. 붉은색이나 검은색으로 칠한다. 자루 아래에 덮어씌운 쇠[冒鐵]가 있는데, 둥글고 뾰족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성종대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예로부터 병(兵)은 칼을 뜻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군사 훈련은 주로 진법 위주였고 칼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단병기인 검술까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단병기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자 중국과 일본의 도검들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검은 종류가 크게 늘어났다.

1790년(정조 14)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조선의 도검에 대한 내용이 그림과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즉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등이 그것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검인 환도는 단도(短刀) 또는 예도라고 불렸다. 다만 환도는 길이가 3척 3촌이고, 자루의 길이가 1척이다. 이는 조선전기의 환도에 비해 훨씬 길어진 것인데, 개인의 격자술(擊刺術)로서의 검술이 중요시된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전용 칼 이외에도 의장용, 벽사용(辟邪用) 등 다양한 칼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칼이 인검(寅劍)이다. 60년마다 제작하는 사인검(四寅劍)은 양날의 형태이고 지지(地支)의 호랑이 인(寅)이 들어간 연월일시, 즉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작하여 액을 막는 기능을 하였다. 사인검은 주로 국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칼로 알려져 있다.

형태

도는 곡선 형태로 일명 곡도(曲刀)라고 한다. 한쪽에만 날이 있으며 자루 부분이 검에 비하여 길다. 검은 직선 형태로 양쪽에 날이 있으며 자루 부분이 짧은 편이다. 도는 그 형태가 주로 베는 데 용이하도록 되어 있다. 처음에는 칼집이 없이 주로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자루 부분을 한 손으로 잡고 다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패용의 편리성이 고려되면서 도에 점차 칼집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검은 칼집이 있어 들고 다니거나 허리에 차고 다니기에 용이하였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칼집에는 두 개의 끈이 길게 늘어져 혁대와 연결된 형태였다가 조선후기에 가면 두 개의 끈이 짧게 혁대와 연결되는 형태를 띠었다. 이는 종래 의장용의 성격이 강하던 패용 방식에서 검술의 실전성을 높이기 위한 방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우리나라에서 도검이 일찍부터 발달해 온 까닭에 관련된 설화·속담·일화가 많다. 동명성왕(東明聖王)의 단검(斷劍), 김유신(金庾信)의 신검(新劍), 장보고(張保皐)의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 등이 있다. 도검에 관한 속담들도 적지 않아 칼이 서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속담에서 칼은 강력한 무기나 흉기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가장 많고 그 밖에 도구, 치장의 수단으로도 쓰인다. ‘모기 보고 칼 뺀다’는 하잘것없는 일에 크게 성을 낸다는 뜻이고, ‘도마 위의 고기가 칼을 무서워하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 무서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칼로 물 베기’는 갈라지기는 해도 금방 합쳐진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 『삼국지(三國志)』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도경(高麗圖經)』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무예제보(武藝諸譜)』
  •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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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재광, 「조선시대 도검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예지』1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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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