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籩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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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제사 의례에서 다양한 식물성·동물성 재료로 만든 음식들을 담아 진설(陳設)하는 제기.

개설

변(籩)과 두(豆)는 고금의 국가 제례에서 중요하게 상용된 제기로서, 식물성·동물성 재료로 만든 각종 음식을 골고루 담아 신령에게 진헌(進獻)하는 데 사용되었다. 나무로 만든 변에는 마른 과일, 생선포, 육포, 떡 등의 마른 음식을 담고, 나무로 만든 두에는 침채류, 어젓·육젓류, 죽, 삶은 고기 등의 젖은 음식을 담았다. 조선시대 국가 제례의 분류 체계, 즉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기고(祈告), 주현(州縣), 속제(俗祭) 등의 구분 및 각각에 속하는 다수 제례의 규모·격식·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진설되었는데, 많게는 10개가 사용되었고, 가장 적게는 1개가 놓이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중국 고대의 삼례(三禮), 즉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에서 변·두의 진설 법식과 용례의 원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변에는 마른 음식을 담고, 두에는 젖은 음식을 담아, 이로써 양자 간에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이는 후대의 변·두 진설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자 규정으로 계승되었다. 이어서 당대(唐代)의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에서는 변·두에 관련된 예제(禮制)와 진설 법식이 1차적으로 정립되었다. 즉 국가 제례의 대사, 중사, 소사 등의 구분에 상응하여 변과 두를 차등 진설하는 핵심 원칙이 정해졌고, 이 원칙은 명청(明淸) 시대까지 계승되었다.

조선의 국가 제례에도 이러한 변·두 진설의 기본 원칙이 그대로 수용되었지만, 변과 두에 담기는 음식의 세부 품목에서는 독자적인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쳤다. 조선시대의 변·두 진설은 당·송·명대의 규정뿐 아니라, 고려시대의 규정에서도 일정하게 영향을 받았다.

형태

남송대의 주희(朱熹)가 지은 『소희주현석전의도(紹熙州縣釋奠儀圖)』에는 변과 두의 외형 및 규격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이 조선시대의 변·두의 제작 규격으로 계승되었다. 그에 따르면, 변과 두는 똑같이 기구(器口)의 지름이 4치 9푼(약 15㎝), 받침다리[足]를 포함한 전체의 높이는 5치 9푼(약 18㎝), 음식물을 담는 쟁반 내부의 깊이는 1치 4푼(약 4㎝), 받침다리의 지름은 5치 1푼(약 15㎝)이며, 모두 덮개를 지녔다. 변의 덮개로 사용되는 멱(羃)은 거친 갈포(葛布) 1폭(幅)을 둥글게 둘러서 만드는데, 겉은 검은색이고 속은 붉은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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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춘관통고(春官通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