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선(節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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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절에 진상 또는 선물하는 부채.

개설

음력 5월 5일 단오에 지방 감영 등에서 왕에게 절선을 진상하면 왕은 그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단오선(端午扇) 혹은 단오절선(端午節扇)이라 불리기도 한다. 절일(節日)에 사용되는 절물(節物)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에는 여름에는 부채를, 겨울에는 달력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공조(工曹)에서 단오에 단오선을 만들어 바치면 왕은 시종관(侍從官) 이상 삼영(三營)에까지 나누어 주었다. 지방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두 감영(監營)과 삼도통제사가 관할하던 통제영(統制營)에서도 단오가 되면 왕에게 부채를 진상하였다. 지방에서 진상하는 절선의 양이 경상도 진주에서만 5~6만 자루에 달하여 그 지역의 대나무만으로 부족해 다른 지역에서 공수해 올 정도였다고 한다(『숙종실록』 6년 4월 20일).

절선은 두 도의 상황에 따라 그 양이 조정되기도 하였다. 1762년(영조 38)에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상황이 좋지 않아 반으로 감해 진상하도록 하였으며(『영조실록』38년 10월 20일), 1814년(순조 14)에는 영·호남 모두 흉년이 들어 아예 절선을 진상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순조실록』 14년 8월 1일).

그 외 절선은 뇌물로 보내지기도 하였는데, 1671년(현종 12)에 경기·충청의 감사와 통제사(統制使)유여량(柳汝𣛀)이 벼슬이 높은 내관에게 절선을 보낸 것을 구실로 삼아 파직시킨 일이 있었다(『현종실록』 12년 6월 6일).

형태

부채는 크게 만든 것은 살의 개수가 40~50개나 된다. 부채의 살이 흰 것은 백첩(白貼)이라 부르며, 칠을 한 것은 칠첩(漆貼)이라 부른다. 이 두 색상을 가장 선호하였다. 그 외 적색과 황색은 여성과 아이들이, 청색은 신랑이 사용하였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의하면, 조선후기에는 아청색(鴉靑色)의 부채가 선호되었다고 한다. 부채의 한 종류인 둥근 부채[團扇]는 기름칠이나 검은 칠을 하며 오두나무 잎 형태도 있었다. 부채를 하사받으면 그곳에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버드나무가지·도화(桃花)·나비·연꽃·붕어·해오라기 등을 주로 그렸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절선을 왕에게 진상한 것 외에도 감사와 병사도 중앙의 관리와 친구들에게 부채를 보냈는데, 전라도전주와 남평(南平)(현 나주)에서 만든 것이 가장 선호되었다. 부채는 원래 실용성 때문에 만들어졌으나 항상 지니고 다니게 되면서 일종의 장신구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경도잡지(京都雜誌)』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목민심서(牧民心書)』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삼국·고려시대편』,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신문·잡지편(1876~1945)』,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현대신문편(1946~1970)』, 2006.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 김명자, 「한국 세시풍속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상기숙, 「중국 세시풍속을 통해 본 민간신앙 제양상」, 『동방학』18집,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