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화(緜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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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의생활 등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섬유작물로 면섬유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 작물.

개설

고려말에 문익점이 중국에서 도입하였는데, 경상도 산청 지역에 살던 장인(丈人)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전해주어 재배하게 하였던 것이 한국에서 면화 재배의 시초이다. 면화는 밭에서 6, 7개월 정도 자라면 꽃이 피는데, 꽃이 떨어지면 다래가 맺힌다. 다래 속에 씨와 씨에 붙어 있는 솜털이 발달하는데, 이를 따서 잘 말린다. 씨아로 솜털에서 씨를 빼내고, 목화솜을 고치에 말아 고치솜으로 만든다. 고치솜을 물레에 걸어 실을 잣는다. 이렇게 뽑아낸 실을 베틀에 올려 면포를 제작한다. 면화(綿花), 초면(草綿) 등으로도 불리는데, 면화(緜花)보다 면화(綿花)를 더 많이 쓰고 있다.

연원 및 변천

고려말 이후 면화 재배가 널리 보급되고, 면포 직조 기술도 발전하였다.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하고, 중국 승려에게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면화 재배와 면포 직조 보급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면화 보급에 노력하여 1374년 공민왕 말년 이후부터는 삼남 일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왕조 개창 이후 면화 재배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 15세기까지는 면화 재배가 아직 제한적인 상태에 있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면화 재배 군현으로 확인되는 지역은 전국 335개 군현 가운데 42개 군현에 불과하였다.

면화 재배는 15세기 중반 이후 크게 확대되는데, 기후 조건으로 재배가 불가능한 함경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면화가 재배되었다. 면화 재배의 확대는 16세기 이후 군포(軍布) 명목으로 면포(綿布)를 부세로 수취하는 것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반 백성의 의생활이 마포(麻布) 즉 삼베 중심에서 면포(綿布) 즉 무명으로 변하면서 면화가 의료작물로서 정착된 것이다.

면화 재배법은 농서에도 수록되었는데, 15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에 면화 재배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편찬되는 농서에는 면화 경작법이 대개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말경이면 삼남 지역은 이미 면화 재배가 일반화되었으며, 북방지역은 국가의 이 지역에 대한 면작 확대정책과 맞물려 평안도에서는 정착단계에 들어가고 함경도에도 점차 보급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17세기 중반에 신속(申洬)은『농가집성(農家集成)』을 편찬하면서 면화 재배법을 크게 증보하여 수록하였다. 충청도에서 면화를 전업으로 재배할 경우 다른 작물을 중간에 간종(間種)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을 추가하였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은 면화를 재배하여 의류로 만드는 데 필요한 거핵기술(去核技術)과 방적기술(紡績技術) 등을 혁신하자고 주장하였다. 특히 북학파들은 중국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면화를 재배하여 면포를 만드는 과정에 씨아, 물레, 베틀과 같은 도구와 기계가 활용되었다. 삼, 누에, 모시 등에서 베, 명주, 모시 등의 피륙을 짜내는 과정을 길쌈이라고 하는데, 면화에서 면포를 짜내는 과정도 길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 베틀에서 면포를 짜는 과정에서 베 짜는 소리 등 전통노래가 생겨났다.

참고문헌

  • 김용섭, 『조선후기 농학사 연구』, 일조각, 1988.
  • 남미혜, 「조선전기 면업정책과 면포의 생산」, 『국사관논총』80, 1998.
  • 민성기, 『조선농업사연구』, 일조각, 1988.
  • 박성식, 「려말선초의 목면업에 대하여」, 『대구사학』17, 1979.
  • 이호철, 『조선전기 농업경제사』, 한길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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