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목정(都目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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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이조와 병조에서 거행한 인사 행정.

개설

도목정사는 해마다 6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행하는 관리의 인사 행정이었다. 12월에 실시되는 세말(歲末) 도목정은 대정(大政)이라 하고, 6월에 행하는 도목정은 소정(小政)이라 하였다. 1405년(태종 5)에 대정 뒤에는 소정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두 번에 걸친 도목은 그 이전부터 제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무반직이나 군병의 경우에는 두 번의 도목을 시행하는 달을 달리하거나, 도목 횟수를 1도목 혹은 3도목 내지 6도목으로 나누어 거행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정부에서는 해마다 중앙과 지방 관리의 공로와 과실을 평가하여 유능한 사람을 승진시키고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는 행사를 거행하였는데, 이를 도목정이라 이르고, 수시로 제수(除授)하는 것을 전동정(轉動政)이라 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5일). 세말 도목정은 12월에 시행되었지만 1422년(세종 4)에 비로소 6월 도목이 생겨 1년 양도목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이미 제정된 6월 도목이 유명무실하다가 이때에 와서 재시행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무 경관직의 각 아문에 소속된 관료들과 6품 이상의 외관들은 두 차례의 정기 도목정으로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내용

문무 경관직 관료들과 6품 이상의 외관들은 정기 도목정과 전동정 혹은 산정(散政)을 통하여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그런데 선전관 등 무반직과 군병 등의 경우에는 번차(番次)에 따라서 도목을 시행하였다. 선전관·겸사복·내금위·공신적장·친군위·별시위·갑사·습독관·궁인(弓人)·시인(矢人)·제원(諸員)·제주자제(濟州子弟)·반당(伴倘)·나장(羅將)·조예(皂隷)·보충대는 양도목이기는 하였지만 개정하는 달을 1월과 7월로 달리하였다. 또한 족친위와 충의위·의원(醫員)·승문원 제원·장용위·동몽훈도·파진군은 4도목으로 1·4·7·10월에, 정병(正兵)은 6도목으로 2·4·6·8·10·12월에 행하였다. 이 밖에 충찬위와 태평소·취라치·파적위·대졸(隊卒)·팽대(彭排)는 3도목으로 4·7·10월에, 관령(管領)과 수군·조졸은 1도목으로 1월에 행하였다.

도목정사는 이조와 병조에서 주관하였다. 이조에서는 판서와 참판·참의, 병조에서는 판서와 참판·참의·참지 그리고 양 조의 낭관 및 도승지와 승지 1명이 참여하여 사무를 시작하였다. 보통 하루나 이틀에 걸쳐 행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3일이 걸리기도 하였다. 왕의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판서의 연고 등으로 이를 늦추어서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사 행정은 정기 도목정보다 부정기적인 산정이 일반적이었다.

개정이 되면 후보자의 인사 자료에 대한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졌다. 군사(軍士)들의 경우, 관장하는 장(將)이 근무 일수를 계산하여 장부를 병조에 올렸다. 충의위는 충훈부에서 담당하였다. 그러면 승서와 승품·출륙(出六)·환차(換差) 등 다양한 방식을 대상으로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그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이 명단을 삼망단자(三望單子)라고 하였다. 삼망은 첫 번째 후보자인 수망(首望), 두 번째 후보자인 부망(副望), 마지막 후보자인 말망(末望)을 합친 말이었다. 이 단자를 왕에게 올리면 왕은 이 중에서 한 후보자를 낙점하였다. 그럼으로써 도목정의 인사는 종결되었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우왕 이전에 부위(府衛)는 대정(隊正) 이상, 각사(各司)는 9품 이상, 부사서도(府史胥徒) 등은 모두 근무 기간의 연월을 적어 내고 공과를 기록하게 하여 세초(歲抄)에 벼슬을 올리고 내리게 하였는데, 이것을 도목정이라 하였다. 이것이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1388년(창왕 즉위년)에 전선법(銓選法)이 회복되고,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에는 도력장(都歷狀)을 가지고 그 사람의 근무 태도가 근면한지 태만한지를 따져서 근면한 자는 승급하고 태만한 자는 파면하며, 새로 제수된 자가 이듬해의 관록을 받고 그해의 일을 성실히 행하게 하는 것을 ‘세말도목정(歲末都目政)’이라고 하였다(『정종실록』 1년 12월 1일). 도목정에 관한 법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던 것을 다시금 시행하도록 한 것이 1399년(정종 1)이었다. 그리고 1422년(세종 4)에 6월 도목이 시행되어 양도목이 되었다.

도목정의 개정에는 이조 삼당상(三堂上)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사는 여러 이유로 매우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사책(政事冊)』에 수록된 이조(吏曹) 전관(銓官)들의 불참 사유를 검토해 보면, 삼당상 중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다음과 같은 사유를 들었다. 곧 휴가, 왕명으로 공무 수행중, 패초(牌招)에도 나오지 않음, 임명되지 않음, 칭병, 숙배하지 않음, 사직상소를 올리고 물러남,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려오지 않음, 의금부의 명을 기다림, 집이 성 밖에 있음, 왕명이 내려오지 않음, 과거 시험관으로 나감, 상중(喪中), 품계의 승진 등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휴가와 패초에도 나오지 않음, 임명되지 않음 등이 주된 사유였으며, 임명되지 않았다거나 숙배하지 않은 것은 참판이나 참의가 이에 해당하였다.

판서와 참의가 어떤 연고로 불참하더라도 참판 혼자 정사를 열 수 있었다. 새로 이조 판서에 임명된 자의 경우에는 곧바로 그날의 정사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조에서는 ‘판서패초부진(判書牌招不進)’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아뢴 후에, 정사를 실시하였다. 인사의 총책임자인 이조 판서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사를 행할 수 없었으므로 우선 이조 판서의 정사를 단행한 후에 이러한 절차를 거쳤던 것이다. 그렇지만 판서가 불참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사를 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판서와 참판이 패초(牌招)로도 나오지 않아 참의 혼자 정사를 열어야 할 경우에는 긴급한 직임만을 내도록[出緊任] 하기도 하였다. 긴급한 직임이라고 하여 특별히 정해진 기준은 없었다. ‘출긴임(出緊任)’은 정사를 시행하는 중간에 단행되기도 하였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른 긴급성 여부로 결정되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평상시대로[仍爲之] 정사를 열었다.

도목정사에는 왕이 직접 참석하기도 하였다. 세종·성종 연간에 행해진 바 있으며, 영조 연간에는 거의 영조가 직접 참석하여 단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즉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목정은 국가의 대사이므로 직접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영조 치세 중반경부터는 더욱 철저히 참석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775년(영조 51) 12월에 왕세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면서도 용병(用兵)·용형(用刑)과 함께 도목정은 자신이 직접 행하겠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의 도목정 규정은 『속대전』에 이르러 약간 개정이 이루어졌다. 선전관과 공신 적장·습독관은 양도목에서 4도목으로, 충찬위는 도목 수는 같으나 10월에 하던 것을 1월로 바꾸었다. 그 후 무관에 관한 규정은 더욱 구체화되어 『대전회통』에 자세하게 수록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정사책(政事冊)』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임민혁, 『영조의 정치와 예(禮): 부(附), 해유(解由)와 문치(文治)』, 민속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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