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둔(伊川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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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군사적 요충지인 이천 지역에 유민을 모집하여 개간하고 이들을 군사로 활용하기 위하여 만든 둔전.

개설

강원도 이천(伊川)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17세기 중엽 유민(流民)들을 모집하여 화전(火田)을 개간하고 관이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형식으로 둔전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천둔이었다. 이천둔은 유민적 계층을 모집하여 이를 경작하게 하여 자립성을 제고시킨 후 궁극적으로 국역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는 당시 전형적인 모민설둔(募民設屯)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후반 정부는 이천둔에 대해 정총제(定摠制)를 채택하여 안정적인 수취액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천둔의 수취 과정에서 면·리의 조직을 중심으로 한 향촌 내 제 세력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민전과 같은 작부제(作夫制)도 확인되었다.

내용 및 변천

강원도 이천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이천수령은 무신이 임명되었다. 이천 지역에는 애초에 훈련도감 둔전이 설치되었으나, 숙종초 남인정권에 의해 도체찰사로 이속된 후 첨사진이 되었다가 혁파되고 다시 이천부에 흡수·통합되었다(『숙종실록』 6년 4월 7일). 17세기 이후 조선 정부는 군문·아문의 재정 확보는 물론 전쟁으로 발생한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민을 안집시키려는 목적에서 둔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천둔전에는 유민으로 파악되는 부류가 집단적으로 취락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다. 1681년(숙종 7) 호적에 의하면 이천둔민은 2,000명 정도의 민호(民戶)에 남정(男丁)이 6,000여 명이었는데, 그중 유민이 6할을 차지하였다. 유민호(流民戶)와 원민호(元民戶)는 직역 구성상 차이를 보였다. 둔전민은 신역을 매개로 소속 기관에 강하게 예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천둔전은 피역자의 소굴이 되면서, 둔전민 역시 초기 예속민이나 유민적 존재에서 일반 농민과 사실상 동일한 존재로 변모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이천둔전 역시 정총제(定摠制)의 수취 방식을 채택하였다. 매해 농사 형편에 구애받지 않는 안정적인 수취액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둔전에 대한 수취는 수령이 주관하였는데, 이때에는 풍흉에 따라 수취량을 조절함으로써 수취 과정상 그리 큰 문제가 야기되지는 않았으나 몇 가지 무리한 이유로 결수 평가가 215결에서 330결로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정총제 하의 이천둔전 수취 과정에서는 면·리의 조직을 중심으로 한 향촌 내 제 세력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이천둔전은 민전과 마찬가지로 작부제(作夫制)에 의한 수취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토호들이 호수(戶首)의 역할을 하면서 중간 수탈을 자행하는 이른바 양호(養戶)의 문제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19세기 접어들어 호수는 혁파되고 결당 8냥씩 총 1,612냥 1전 4분을 거두었다. 둔전의 수취는 수령의 주관 하에 면·리의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기본단위는 리(里)였다.

참고문헌

  •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연구』, 경인문화사, 2006.
  • 김우철, 「17세기 후반 강원도 이천의 직역 분포와 속오군의 편성실태」, 『군사』 36,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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