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정(卜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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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중앙이나 지방의 상급 관청에서 하급 지방 군현에 물품을 공물(貢物) 이외에 배정하는 것.

개설

복정(卜定)이란 ‘부담시키다’, ‘떠맡기다’ 뜻으로 이두로 ‘지정’이라고 읽는다. 관문복정(關文卜定)이라고 하여 외방에 보내는 공문인 관문을 통해 행해지고, 이때 국정 최고 기관인 의정부를 거쳐서 공문이 내려가거나 아니면 직관(直關)이라고 하여 직접 공문을 내려보내거나 하였다. 배정 주체에 따라 중앙 기관에서 행하는 경사복정(京司卜定), 지방 영문에서 행하는 영문복정(營門卜定)이 있다. 배정 시기에 따라 연례로 행하는 연례복정(年例卜定), 상복정(常卜定), 원복정(元卜定), 그리고 수시로 행하는 수시복정(隨時卜定), 별복정(別卜定), 신복정(新卜定) 등이 있다. 대부분은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무가복정(無價卜定)이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헐값이지만 대가가 지불되는 급가복정(給價卜定)도 행해졌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모든 기관은 필요한 물품을 공물로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물품의 종류, 수량, 납기, 수납처 등은 공안(貢案)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상급 기관에서 공안에 등재된 것 이외에 별도로 물품을 군현에 배정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간주되는 금지 사항이었다. 그렇지만 부족한 재원이나 불시에 발생하는 용도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확보하기 위해 이를 어기고 임의로 물품을 배정하는 경우가 조선시대 내내 일상화되어 있었다.

내용

복정은 재정력이 충분치 못한 경중(京中) 각사(各司), 즉 의정부, 중추부, 기로소 등이 주로 행하였다. 여기에 최고 재정 기관인 호조과 선혜청, 그리고 왕실 재정 기관인 내수사도 가세하였다. 그리고 감영, 병영, 수영 등 지방의 상급 관청도 빠지지 않았다. 그 결과 중앙관부나 지방 영문 중에 복정을 행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 외에 국가의 큰 행사 때에 한시적으로 설치·운영되는 도감(都監)에서, 일본 사신으로 통신사가 갈 때나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가 갈 때도 외방복정을 하였다.

변천

공안에 등재되지 않은 물품을 추가로 배정하는 복정이 민폐를 유발시키자 정부는 민간복정을 금하도록 하였다. 가뭄으로 과일이 열리지 않자 장원서(掌苑署)는 해조(該曹)의 이첩을 통해 충청도에 배정하여 상납하도록 하였다. 충청도 사람들은 수포(收布)를 하여 방납(防納)하는 번거로움과 추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중종은 1527년(중종 22)에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복정을 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복정은 중단되지 않았다.

17세기에 대동법이 실시될 때에 복정의 일부는 대동미에 흡수하고, 서울에서 구입하기가 어려운 물품만 부득이 복정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복정이 계속되고 그로 인한 민폐가 끊이지 않아 정부는 계속 금하도록 하였지만 공가 절감책의 일환으로 여전히 중단되지 않았다. 그래서 1751년(영조 27)에 비교적 재정 수요가 많지 않은 사재감(司宰監)에서도 복정한 어염의 수가 원공(元貢)보다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의의

중앙이나 지방의 상급 관청은 재원 부족이나 불시에 발생하는 용도를 이유로 예하 군현에 복정을 행하여 각종 물품을 배정하였다. 그러나 복정이 군현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자 정부는 복정을 금지시키고 대동미에 포함시키는 노력을 폈지만 끝내 중단시키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 김덕진,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3, 일조각, 1988.
  • 변광석, 「1811년 통신사 파견과 경상도의 재정 부담」, 『역사와 경계』 55, 2005.
  • 한영국, 「호남에 실시된 대동법」, 『역사학보』 20, 196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