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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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의 면적을 세던 단위.

개설

수확을 할 때 한 손으로 쥐는 분량을 한 움큼[把]이라 하고, 열 움큼을 한 묶음[束], 열 묶음을 한 짐[負], 100짐을 1결(結)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작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실제 면적이 달랐다. 고려시대부터 조선건국 초기까지는 1결의 면적을 3등급으로 구분하였지만, 1444년(세종 26)부터 공법(貢法)이 시행되면서 토질의 비옥하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세분되었다[田品六等](『세종실록』 26년 1월 10일). 『경국대전』에 따르면, 1등전 1결은 38무(畝), 2등전은 44무 7푼(分), 3등전은 54무 2푼, 4등전은 69무, 5등전은 95무, 6등전은 152무에 준하였다.

내용

고려시대의 제도에 따르면, 6촌(寸)을 1푼, 10푼을 1척(尺), 6척을 1보(步)로 하였다. 그리고 둘레 33보를 1결로 정하였다. 농부의 뼘[手幅]을 주척(周尺)으로 계산하면 약 6촌인데 이것을 1푼으로 해서 이렇게 계산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손으로 쥐는 분량을 한 움큼이라 하고, 열 움큼을 한 묶음, 열 묶음을 한 짐, 100짐을 1결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경작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실제 면적이 달랐고, 비옥한 땅은 같은 1결이라도 면적이 더 적었다.

한편, 결이 농가 한 가구에 나누어 주기 위한 면적이었기 때문에 ‘몫’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문종 때까지 1결의 면적은 성인 남자[丁]의 가운뎃손가락[中指] 10개의 길이인 지척(指尺)으로 사방 640척(15,447.5㎡)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건국 초기까지는 1결의 면적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였으며, 전지(田地)를 측량하는 시기에 따라 1결의 면적은 조금씩 달랐다. 1405년(태종 5) 무렵에는 1결의 면적이 사방 33보, 즉 3만9204평방척이었다. 그렇지만 1428년(세종 10)의 양전에서 상전(上田)의 양전척(量田尺)은 20지(指), 중전(中田)은 25지, 하전(下田)은 36지를 각각 사용하였다. 그 결과 상전 1결은 15만 2,568평방척, 중전은 23만9414평방척, 하전은 34만5744평방척이 되었다.

그러다가 1444년부터 공법이 시행되면서 토질의 비옥하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 상상·상하·중상·중하·하상·하하의 6등급으로 세분되었다. 그리고 양전(量田)에 사용하는 잣대[田尺]의 길이도 토질의 등급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용하였다. 이렇게 개정된 전품양전(田品量田) 방식은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등전의 양전척은 주척으로 4척 7촌 7푼 5리이었으며, 2등전은 5척 1촌 7푼 9리, 3등전은 5척 7촌 3리, 4등전은 6척 4촌 3푼 4리, 5등전은 7척 5촌 5푼, 6등전은 9척 5촌 5푼이었다. 이처럼 6등전까지 내려올수록 양전척의 길이는 길어졌다. 이를 경무법(頃畝法)으로 환산하면 1등전 1결은 38무, 2등전은 44무 7푼, 3등전은 54무 2푼, 4등전은 69무, 5등전은 95무, 6등전은 152무에 준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1865년(고종 2) 『대전회통』이 편찬될 때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 박시형, 「이조 전세 제도의 성립 과정」, 『진단학보』 14, 1941.
  • 박흥수, 「신라 및 고려의 양전법에 관하여」, 『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11, 1972.
  • 박흥수, 「이조 척도에 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 4,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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