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군(轝士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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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 때에 상여를 메기 위하여 동원된 사람.

내용

여사군(轝士軍)은 국상 때에 상여를 메기 위하여 동원된 사람들로서, 도성의 5부 방민(坊民)에게서 방역(坊役)의 요역노동을 차출하는 방식으로 동원하였다. 국상에서의 여사군을 비롯한 각종 단기간의 잡역에 징발되는 방역은 귀천을 막론하고 각호에서 장정 1명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잔호(殘戶)·독호(獨戶) 및 관부에 입역하는 자로서 솔정(率丁)이 없는 자 외에는 대신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출정(出丁)하도록 하였다. 산릉도감의 원역으로 활동하는 관료일지라도 솔정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 그나마 명단을 한성부에 통보한 뒤에라야 징발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도성 내 경수소(警守所) 등에서 철야 경비하는 좌경(坐更)의 방역을 분정할 때 쓰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방역의 엄격한 출정 방식에도 불구하고, 매번 역사가 있을 때마다 징발에서 누락된 자가 많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특히 부리(部吏)들이 뇌물을 받고 조종하는 폐단이 극심하였다.

한성부는 5부에 명령하여 소속 320여 계(契)가좌성책(家座成冊)을 작성·제출하게 하고, 이를 호적과 대조하여 누락자가 없는 지 검토하였다. 다시 이 가운데 탈이 없는 자를 추려서 일꾼으로 차출하였다. 그런데 1684년(숙종 10) 한성부 보고에 따르면, 상사(上司)와 각 아문에 소속된 원역(員役)들은 내어 쓰지 말라고 혹은 공문을 보내고 혹은 감결(甘結)을 보내는 등 압력을 가하는 형편이었다. 여러 관청에서 소속 원역을 여사군 차출에서 빼달라고 하는 청탁성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에, 한성부에서는 망설이는 사이에 장부를 맸다가 뜯었다가 하는 일을 되풀이하였다고 한다.

1673년(현종 13)의 효종 영릉(寧陵) 천릉역(遷陵役)에서는, 여사군으로 징발된 오부 방민의 수가 7,000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2일정의 방역에 징발되었다. 시전(市廛) 소속의 시민(市民)들도 방민과는 별도로 국상 시의 봉거군(捧炬軍)·봉촉군(捧燭軍) 등의 명색으로 동원될 수 있었다. 이들 시민군(市民軍)은 평시서(平市署)를 통해서 징발되었다.

1731년(영조 7)에 있었던 인조 장릉(長陵) 천릉역 당시 필요한 여사군은 30,000여 명에 달하였다. 도성 호적에 오른 원호(元戶) 31,000여 호에서, 삼군문 군병 및 맹인·독녀 등 면역할 사람을 덜어낸 뒤, 실제 여사군으로 차출한 것은 불과 10,000여 호였다. 결국 여사군에 포함된 도유군(都遊軍)·가사령(假使令) 등 명색으로 징발·사역할 인원수를 줄이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도성에서는 여사군을 징발하는 방역이 원활하게 수행되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용례

漢城府抄坊民一千二百名 分送山所 又抄轝士軍四千七百人 蓋勿論貴賤 一戶各出一人云 (『인조실록』 4년 3월 20일)

참고문헌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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