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총(還摠)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9일 (토) 23:13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환곡의 총수량.

개설

조선후기의 환곡(還穀)은 1650년(효종 1) 상평청에 환곡이 창설되면서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효종실록』 1년 5월 25일). 상평청에 환곡 설치를 계기로 호조(戶曹) 이외에 환곡을 관리하는 기관도 늘어났다. 이에 진휼청에서도 환곡을 운영하는 등, 18세기 초반 들어 약 5,000,000석의 환곡이 비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는 비변사에서도 환곡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또 균역법을 계기로 균역청에서도 환곡을 운영하는 등 중앙의 여러 기관에서 환곡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는 감영·병영·수영·통제영에서도 환곡을 운영하여 18세기 이후 환곡은 급격히 그 총액이 늘어났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무상분급을 자주 시행하면서 19세기 말에 이르면 환곡의 총액이 크게 줄어들었다.

내용

조선후기의 환곡은 1650년(효종 1)을 기점으로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이라는 외침을 겪은 조선왕조는 국가 경비의 부족과 비축 곡물의 부족을 해결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당시 환곡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호조에서 관리하는 환곡의 이자 30%를 상평청에 이관시켜 새로운 환곡을 창설하였다. 이른바 상평청 환곡이 탄생한 것이었다. 상평청 환곡의 운영은 호조 환곡과 동일하게 10%의 이자를 징수하였지만, 그 이자의 4/5를 원곡(元穀)에 보충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때문에 상평청 환곡의 양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7세기 후반 빈번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해야 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진휼청은 상설화되어 갔고, 결국은 진휼청에서도 환곡을 운영하게 되었다. 호조와 상평청·진휼청이 환곡을 운영하게 되면서 조선의 비축 곡물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반에는 약 5,000,000석의 환곡이 비축된 것이었다.

호조나 진휼청·상평청 이외에 비변사에서도 환곡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또 균역법을 계기로 균역청에서도 환곡을 운영하는 등 중앙의 여러 기관에서 환곡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에서는 감영·병영·수영·통제영에서 환곡을 운영하여 18세기 이후 환곡은 급격히 그 총액이 늘어났다.

이러한 환곡의 전국적인 증가 추세 속에서 정부는 환곡의 전국적인 총액 파악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776년(정조 즉위년)에 작성된 『곡부합록(穀簿合錄)』과 1797년(정조 21)에 작성된 『곡총편고(穀摠便攷)』였다.

『곡부합록』은 환곡뿐 아니라 정조 즉위 당시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를 비롯하여 군문의 보미(保米) 등을 포괄한 자료지만 환곡이 그 중심에 있었다. 여기에는 전국 팔도의 환곡 총액이 기록되었는데, 환곡을 관리하는 호조·상진청·비변사·균역청 등 각 관서의 환곡이 각 도의 군현에 보관되어 있는 액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비록 자료가 완전히 보존되지 못하여 일부 기관의 환곡은 고을별 액수가 누락되어 있지만, 18세기 후반에 전국의 각 고을에 중앙의 각 기관에서 보유한 환곡 액수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이보다 앞선 고을별 환곡으로는 『여지도서』에 나타나는 고을별 환곡 액수 자료가 있다. 『여지도서』는 호적 편찬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1759년(영조 35)에 대다수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의 환곡 총액은 각 기관별 환곡 액수를 분명히 구분하여 기재한 지역보다는, 뭉뚱그려 표기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이외에도 작성 시기가 1840년대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의 전국 고을별 지도 안에도 곡식의 총액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해동지도』에는 대부분 환곡의 총액을 기록하고 있어서 기관별 총액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곡총편고』는 1797년(정조 21) 당시의 환곡 운영을 기록한 자료였다. 1797년 당시 환곡의 총액과 이자의 액수 그리고 그 이자의 사용처를 기록하였다. 각 환곡이 창설 연원이 기록된 매우 귀중한 자료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별 환곡 총액은 확인할 수 있으나, 고을별 환곡의 총액은 확인할 수 없었다.

1807년(순조 7)에 편찬된 『만기요람』 「재용편」 조적(糶糴) 항목에도 당시의 환곡 총액과 도별·기관별 환곡 액수가 기록되었다. 이 자료는 1797년의 『곡총편고』와 상세한 비교가 가능할 뿐 아니라 환곡 운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증보문헌비고』에는 특정한 시점의 중앙 기관 중심의 환곡 총액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환곡 총액 자료를 살펴보면 18세기 전반기에 5,000,000석 정도였던 환곡이 18세기 후반에는 9,000,000석을 넘어서 1797년 약 9,380,000석을 기록하고, 1807년에는 약 9,990,000석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환곡의 총액은 1862년에 이르면 5,000,000여 석으로 줄고 있으며, 그마저도 장부상의 액수이며 절반 이상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환곡 총액의 감소와 함께 무리한 환곡의 운영은 1862년 ‘임술민란’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해동지도(海東地圖)』
  • 『여지도서(輿地圖書)』
  • 『곡부합록(穀簿合錄)』
  • 『곡총편고(穀總便攷)』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송찬섭,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 오일주, 「조선 후기 재정 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실학사상연구』 3, 1992.
  • 오일주, 「조선 후기 국가 재정과 환곡의 부세적 기능의 강화」,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