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衰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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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상 |
한글표제 | 최상 |
한자표제 | 衰裳 |
상위어 | 성복(成服), 최(衰), 최복(衰服), 최의(衰衣) |
관련어 | 성복(成服), 자최(齋衰), 참최(斬衰)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민주 |
용도 | 상복(喪服) |
시기 | 성복(成服)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상(衰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경종수정실록』 1년 6월 4일 |
참최·자최복의 생포(生布)로 만든 최복(衰服)의 하의(下衣).
개설
최상은 생마로 만드는데 남자의 최복에는 고례(古例)에 따라 ‘상(裳)’이라 하였으며, 여자는 ‘장군(長裙)’이라고 하였다. 남자의 상은 앞이 3폭, 뒤가 4폭인 치마이며, 여자의 장군은 폭 6폭을 써서 만드는데 매 폭마다 어슷하게 마름질하며 좁은 쪽이 허리에서 연결되도록 마름질하여 12폭을 이어서 만든 치마이다.
연원 및 변천
참최에 입는 최상은 아주 거친 베로 만들고, 자최에 입는 최상은 다음 등급의 거친 생포를 사용하며, 연제(練祭)를 지낼 때에는 칠승포(七升布)로 된 최상을 입는다. 그러나 1721년(경종 1) 김재로(金在魯)의 상소에 의하면, 상복의 제도는 본디 상하 귀천의 차별이 없는바 친자일 경우의 상복에는 마전하지 않은 최복과 상을 갈아입는다고만 말하고 승수(升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며, 문무백관의 상복에는 최복과 상을 갈아입는다고만 말하고, 승수나 마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아 의혹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였다. 또한 대수(大袖)와 장군(長裙)에 대해서도 최복으로 갈아입는다고 말하고서 또 백포의 대수와 장군을 말함으로써 혼돈을 주었으나 대수장군은 바로 성복(成服)할 때의 최상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남자의 상은 최상이라 하고, 여자의 상은 장군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경종수정실록』 1년 6월 4일).
형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상은 참최에는 극히 거친 생포로 만들며, 자최 이하에는 포를 쓴다. 솔기는 모두 안으로 향하는데 아래 끝은 시접을 넣어 꿰매지 않는다. 자최 이하는 변(邊)을 꿰매고 안으로 말아 넣는다. 앞은 3폭, 뒤는 4폭으로 하며 앞뒤가 연결되지 않고 매 폭은 맞주름 3개를 잡아 바깥쪽에서 꿰맨다고 하였다.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그 형태상의 설명은 같고 다만 주름의 길고 짧음은 상황에 맞게 하며 별도로 넓이 4, 5치 되는 포를 써서 세로로 접고 전후 폭에 끼워서 같이 꿰맨다고 하였으며, 양쪽 끝에 끈을 단다고 하였다.
용도
성복(成服)은 남자는 최의(衰衣)·상·참최관·자최관·저장(苴杖)·삭장(削杖)·관리(菅履)·소리(疏履)로 구성되며, 여자는 대수·장군·개두(蓋頭)·두수(頭繻)를 최복(衰服)으로 입는다. 최복은 조석곡전상식(朝夕哭奠上食)을 할 때와 연제를 지낼 때 입는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주자가례(朱子家禮)』 최상의 제도를 보면, 앞을 3폭 뒤를 4폭으로 하여 시접이 안으로 향하게 바느질하고 앞뒤는 잇지 않는다고 하였다. 각각의 폭에는 3개씩의 주름을 만드는데 양 가장자리를 접어서 서로 붙이고 그 가운데는 비워 놓는다고 하였으므로 맞주름을 잡았다.
『주자가례』에는 여자는 최와 상의 제도를 쓰지 않고 대수·장군·개두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며, 남자의 최복은 순전히 옛날의 제도를 써서 최와 상을 착용한다고 하였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최상에 대하여 말하길, 치마는 안으로 폭을 떼어 내므로 솔기가 안으로 향한다고 하였으며, 치마는 베 7폭을 쓰는데 한 폭이 2자 2치인 것의 가장자리를 1치씩 잘라내므로 2자×7폭=14자로 만들며, 만일 그 허리의 가운데에 주름을 잡지 않으면, 몸을 묶을 수 없기 때문에 한 폭의 베를 세 곳에 연결하여 만든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주자가례(朱子家禮)』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