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범문(光範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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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인 창덕궁의 인정전 동쪽 행각에 있는 협문.

개설

광범문(光範門)은 조선초기에는 그저 인정전의 좌협문으로 불리다가, 1475년(성종 6)에 이 문의 이름인 광범문으로 문액을 달았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인정전의 부속 시설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치러지는 많은 의례에서 왕의 동선에 속했으며, 국가의 행사를 치를 때도 행사의 영역 안에 있어서 협소하지만 중요한 문이었다.

위치 및 용도

광범문은 창덕궁의 인정전 마당을 두르는 행각 동쪽에 있는 작은 문이다. 인정문에서 인정전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인 동쪽에는 광범문, 반대편인 서쪽에는 숭범문이 설치되었다. 광범문은 승정원과 통하고 숭범문은 내의원과 통했다.

국가 의례의 때에는 내전과 인정전을 오가는 왕의 동선에 포함되었다. 또한 향축·어약 등 중요 물품이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에 경비가 삼엄하였고, 정전의 부속 공간이었던 만큼 장소를 어지럽히거나 소란스럽게 하는 행위를 금하는 금란(禁亂)이 엄격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궁궐 내 여인들의 인정전 안뜰 출입도 금란의 행위에 속하였기 때문에 광범문을 지키는 군사를 증원하여 이러한 행위를 막았다(『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4월 26일).

변천 및 현황

광범문은 태종대에 창덕궁을 건설하던 때에 함께 조성되었다. 성종 연간에 궁궐 내에 이름을 달지 않은 문이 많아 혼란을 초래하였으므로 1475년에 서거정에게 명하여 궁궐 내에 있는 이름 없는 문들의 액호를 짓고 문 위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순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과 순조 때 각각 복구하였고, 다시 일제강점기에 본래 모습을 잃고 변형된 것을 1991년에 시작한 창덕궁 복원 사업으로 수보하여 현재에 이른다.

현재 인정전의 행각은 2칸 규모, 즉 세 줄의 열주가 사각형으로 마당을 두르고 늘어서 있다. 인정전 뜰 쪽은 벽체가 없이 열린 복도의 형태로, 바깥쪽 기둥은 벽체로 막아 행각을 조성하였는데 그 동쪽 행각 사이에 광범문이 있다.

형태

광범문은 행각 사이에 설치된 문으로 행각과 대문의 지붕이 같은 높이인 평대문의 형태를 취한다. 대문은 주칠을 한 2짝 판장을 달았고 문의 위쪽에는 안상의 문양대로 구멍을 뚫어 풍혈을 갖춘 궁판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홍살을 얹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광범문의 액호인 광범(光範)은 규범을 빛낸다는 의미이며, 왕의 존안을 뜻하기도 한다. 왕의 얼굴을 뵈옵는 문이라는 뜻으로 작명된 듯하다. 그 의미하는 바처럼 광범문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는데, 그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일성록』의 1780년(정조 4) 5월 22일의 기록에 안창군이경이 분기탱천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린 일화가 있다. 이경이 상참에 참여하였다가 나오는 길에 광범문 밖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입직하던 근장군사가 잡인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공권력을 남용해, 어떤 사람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나가는데도 멈추지 않고 채찍을 쳤고 채찍은 이경의 몸에까지 미칠 지경이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이경은 자신을 수행하던 아랫사람에게 군사의 호패를 빼앗아 오라 명했다. 그러자 입직군사는 이경의 수행원을 거꾸로 호통치며 뜰 안으로 끌고 들어가 매를 치기까지 했다.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이경은 입직군사가 자신을 우습게 여겼을 뿐 아니라 도를 넘는 행위가 공권력의 남용이라는 요지의 상소를 올리며 사직을 청하였지만, 정조는 사직하지 말라며 상소에 대한 답을 내렸다. 이 일화를 보면 인정전 영역의 문을 지키는 일이 어느 정도로 엄격하고 지나쳤는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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