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문(金馬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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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창덕궁 후원 기오헌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

개설

물리적인 형태의 금마문(金馬門)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상징적인 의미의 금마문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미앙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황제의 조칙을 작성하는 관리들이 이곳에서 조서를 기다리거나 드나들며 황제의 명을 수행했다고 알려진 문이다. 이 때문에 학술과 재주, 문장에 뛰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곳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 되기도 했다. 금마문은 고려시대의 한림원, 조선의 집현전·예문관·홍문관·규장각과 같은 곳을 은유하는 말이기도 했다.

위치 및 용도

금마문은 창덕궁 후원에 불로문과 하나의 담장으로 연결되어 불로문 남쪽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 있다.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는 정조대에 규장각이 있던 전각으로 18세기 조선을 이끌어간 학자들의 공간이었다. 그 동북쪽에 이안재·운림거라는 독서하는 작은 집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효명세자가 건립한 의두합이라 부르는 독서처가 있다. 그 북쪽에 연이어 담장으로 둘러 구획한 사각형의 빈 마당이 「동궐도」에 보이는데 이곳에 석거각이 있었으며, 그 동쪽에 금마문, 서쪽에 석거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보아 문신들의 공간 또는 서책을 두는 공간의 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변천 및 현황

『궁궐지』에는 금마문과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인 의두합을 창덕궁에 있는 전각으로 분류하였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마문을 창경궁에 있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금마문 남쪽에 승정원이 있었다고 하니 금마문이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이 장소적 상징성과 일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금마문과 마주 보는 석거문은 연결된 하나의 담으로 영역이 구분되었는데 이 영역 안에 석거각이 있어 유생들이 강론을 펼쳤다는 기사가 『연산군일기』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연산군 이전에도 금마문이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연산군일기』 6년 9월 26일).

1900년대 초까지는 금마문이 있는 공간과 연이은 남쪽 공간에 기오헌 또는 의두합으로 불린 전각이 조성되어 따로 문이 나 있고, 금마문이 설치된 마당과는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담장의 한쪽을 헐어 금마문의 마당으로 열려 있고 금마문이 기오헌으로 들어가는 정문처럼 배치되었다.

형태

현재의 금마문과 달리 「동궐도」 상에서 보이는 금마문은 담장에 연결되어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문의 구조상 사주문(四柱門)의 형태를 하였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이었다. 규모는 정면 2칸으로 조성되었는데, 이 2칸은 각각 규모가 다르고 높이도 다르게 조성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짝 없는 일각문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며, 지붕의 짧은 용마루 위에는 용두를 올려 장식한 문의 모습을 취하고 서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금마문은 금문(金門)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중국 한나라 때의 궁궐인 미앙궁의 문으로 노반문이라고 불렸다. 한나라의 무제가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작은 나라인 대완국의 명마인 ‘한혈마’를 얻은 기쁨에 궁궐 문 앞에 말의 동상을 세우고 문의 이름을 금마문으로 바꾸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는 창덕궁에 실재한 금마문보다는 한나라의 금마문에 빗대어 문인 학자들을 상징하는 용어로 더 많이 쓰였다. 창덕궁의 금마문도 그것에 연유하여 이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서계집(西溪集)』
  • 『강한집(江漢集)』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