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문(宣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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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의 합문.

개설

‘선정(宣政)’이라는 말에는 정치와 가르침을 널리 떨친다는 선양(宣揚)의 의미가 있다. 그대로 풀면 정치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선정전은 창덕궁의 으뜸 편전으로 왕과 신하의 정무가 매일 벌어지는 곳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초기에는 이곳에서 작은 연회가 자주 베풀어졌는데, 특히 왕비가 주관하는 행사들이 치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세조 이전에는 특별한 이름을 갖추지 않고, 신하가 왕께 정무를 아뢰는 전각이라는 보편적 의미의 ‘조계청’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것을 1461년(세조 7) 12월에 ‘선정전’이라는 액호를 내려 편액을 걸게 하였는데, 이때 선정문(宣政門)도 선정전의 의미와 동일하게 하여 정문의 이름으로 정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위치 및 용도

선정문은 창덕궁 선정전의 남쪽 행각에 있는 문이다. 궁궐 남단의 마당에서 대내로 들어가는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연영문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있다. 이는 연영문으로 들어가 양쪽으로 늘어선 부속 건물들 사이의 길쭉한 마당을 지나친다. 마당이 끝나갈 즈음 정면에 마주치는 문이 있는데 이 문이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선정문이다. 선정문 앞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인정전의 동쪽 행각에 있는 광범문이 보이고 이 문을 통과하면 인정전 마당이다. 선정문 앞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공상청·궁방·사알방·등촉방·서리방 등속의 부서가 있는데, 이는 궁궐의 환경을 단속하고 왕실의 생활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들이다.

선정전은 남쪽에 두 겹의 행각을 두었으며, 선정전의 바깥쪽 남행각을 외행각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있는 문이 선정문이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동서로 긴 직사각형의 마당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선전관청, 장방, 조사간 등이 있었다. 「동궐도」 상에서는 선정문의 삼문 가운데 서쪽 문이 천랑과 연결되어 복도각을 만들고, 그 끝은 안쪽의 내행각에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삼문의 중앙 칸과 만나게 되어 있다. 이 문의 중앙 칸 앞에서 다시 천랑이 놓여 선정전까지 이르는 복도각으로 조성되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문은 선정전 중문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전기에는 선정전이 편전으로 쓰였으나 후에는 왕실의 빈전 또는 혼전으로 쓰였기 때문에 선정문 또한 각 시기별로 전각이 전용(轉用)된 사례에 맞는 의례의 공간으로 쓰였고 합문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선정문은 1404년(태종 4)에 창덕궁이 창건되던 때에 조성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소실되었다가 광해군의 중건 역사로 복원되었고 다시 인조반정으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에 복원 역사를 시작하면서, 인경궁의 건물들을 이건하여 각 건물들을 지었다. 1920년대에 창덕궁 내전 영역이 훼손되면서 선정전 영역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선정문이 있던 남쪽 외행각은 이때 사라졌다. 1987년부터 창덕궁의 복원을 시작하여 복도각을 새로 조성하고 기단을 개수했으며, 선정전 중문을 새로 수보하였고, 지금은 이 문에 선정문 편액을 달아 본래의 선정문을 대신하고 있다.

형태

선정문은 외행각 사이에 3칸 규모의 문으로 설치되었다. 중앙의 문은 솟을문으로 올려 조성했고 문 앞의 계단은 장식한 소맷돌로 아름답게 꾸며 문의 위상을 높였다. 맞배지붕의 용마루 또한 양쪽 끝을 취두로 장식하였다. 양쪽의 협문은 행각과 같은 높이의 지붕으로 조성되었고, 문 앞에 두 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동궐도」 상에서는 서쪽의 문이 문짝 없는 빈 문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열려 있는 문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개의 문 모두 주칠을 한 2짝의 판장문을 달았고, 구조는 사주문(四柱門)의 형식을 취하였다. 문의 중앙 어칸의 경우, 문 인방 위에 안상의 모양대로 풍혈을 뚫은 7개의 궁판이 놓여있고 그 위에 홍살을 놓아 문의 위상을 부여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현왕후 윤씨는 성종의 세 번째 왕비였다.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와 숙의의 자리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모후이던 윤씨가 폐비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게 되면서 비어 있던 내전을 숙의윤씨가 채우게 된 것이다. 성종 때까지 계비는 새로 간택하여 뽑지 않았고 후궁 가운데서 책봉하였다. 1480년(성종 11) 11월 8일은 정현왕후 윤씨가 책봉을 받은 날이다. 이날 선정전 월랑의 배위에 나아가 교명·책보·명복을 받고 왕비의 위에 올랐다(『성종실록』 11년 11월 8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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