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광문(明光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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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동쪽, 통화문 근처 행각에 있던 문.

개설

명광문(明光門)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대에 인원왕후의 혼전인 효소전과 정성왕후의 혼전인 휘령전을 오가는 때에 명광문에서 여를 타고 움직였음을 알리는 내용으로 나온다(『영조실록』 33년 9월 21일). 그러나 이 문에 대한 특별한 내용은 찾을 수가 없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아울러 동궐이라 불렀고, 두 궁궐의 궁장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동궐이라는 전체 영역을 놓고 보았을 때, 가장 동쪽 영역에 있던 문이다.

위치 및 용도

동궐의 동쪽 궁장에 있는 문은 홍화문을 중심으로 남쪽에 선인문, 북쪽에 통화문이 있었고, 그 북쪽에 정조대에 후원으로 통하는 장소에 건립한 월근문이 있었다. 명광문은 통화문과 가까이 있어 대내에서 궁궐 밖으로의 출입을 위해 통화문을 사용할 경우 명광문을 경유하였다. 특히 명광문은 전각들 사이에 있는 문이 아니고, 통화문의 안쪽에 남북으로 위치한 넓은 공터를 둘로 구획하기 위해 세운 담장과 행각 사이에 있는 문이다. 궁궐을 감아 도는 금천이 이 공터를 흘러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 옥천교 아래로 흐르는데, 공터의 어구 즉, 도랑 바로 옆에 명광문이 서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이 치러졌고 그 시험의 결과를 축하하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장소의 성격상 정시로 치르는 큰 시험보다는 소소하게 치르는 시험에 주로 쓰였고 큰 시험을 볼 때는 대기 장소로 쓰였다. 왕이 대내에서 춘당대로 행차할 때도 의례의 동선 안에서 경유하여 나가는 문으로 자주 쓰였다.

변천 및 현황

명광문이 어느 때에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00년대 초에는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을 조성한다는 미명 아래 훼손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형태

명광문은 서쪽의 어구를 가로지르는 담장과, 동쪽에 있는 행각 사이에 서 있다. 행각의 동쪽 끝에는 선명문이 있고, 명광문의 서쪽으로 뻗어 나간 담장의 끝에는 통덕문이 명광문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란히 서 있다. 명광문은 정면 1칸 규모의 사주문(四柱門)으로 보이고, 「동궐도」 상에는 문짝이 없어 보이지만 문을 열어놓았음을 표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담장과 행각 사이 솟을문으로 조성되었고 맞배지붕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영조대에는 도성 내의 하천을 준천하는 역사(役事)를 그림과 기사로 잘 남겨놓았다. 『영조실록』에는 명광문에서 일어난 준천 공사와 관련된 당황스러운 기사가 수록돼 있다. 왕이 명광문 앞에 나가 어좌에 앉아 홍계희, 홍봉한 등의 준천에 관한 주장을 듣고 있었는데 당시 도청이었던 허급과 원중회가 서로 자리의 차례를 놓고 다투었다. 이를 본 왕이 명광문 앞에서 이들에게 곤장을 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36년 2월 8일). 그러나 2개월여가 지나 준천 공사가 모두 끝났을 때는 왕이 친히 그들에게 직급을 올려주는 은혜를 베풀었다(『영조실록』 36년 4월 1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