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문(迎鴈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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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서쪽 담장에 있는 문.

개설

영안문(迎鴈門)은 크게 창덕궁과 창경궁을 가르는 완충 지역의 동쪽 담장, 즉 창경궁 쪽에 위치한 담장에 있는 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영안문’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영안(迎鴈)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대로 풀면 기러기를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기러기는 자신의 짝에 대한 정절과 의리를 지키는 새를 의미하기도 하고, 갈대와 기러기를 노안(蘆雁)이라 하여 그림으로 그려 음이 같은 노안(老安)이라는 의미로도 써서 말년의 평안함을 축원하기도 하였다. 창경궁은 대비마마, 즉 여자이며 노인인 대비와 후궁들의 처소가 있는 공간이므로 대비마마의 편안함과 후궁들의 정절과 의리를 기원한 액호인 것으로 여겨진다.

위치 및 용도

영안문은 창경궁의 서쪽 끝단을 이루는 담장에 있는 문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각각의 담장으로 둘러쳐졌지만 이 두 영역을 가르는 완충 지역으로 빈 마당을 두었다. 이 마당에는 교자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교자방이 있었다.

창경궁의 서쪽 영역에는 통명전이 있고, 통명전의 서쪽 바로 옆에는 장을 담은 수없이 많은 항아리가 놓인 장고가 있었다. 장고 또한 통명전 뒤뜰로 이어지는 담장으로 둘러쳐졌고, 담장의 남쪽 끝에는 주작문을 설치해놓았다. 그 주작문의 서쪽에도 빈 마당과 경사면이 있어 수목을 심어놓았는데 사면의 위에 한 번 더 담장을 두르고 그 끝에 영안문을 설치했다. 영안문의 남쪽에는 ‘어재자선당’이라는 이름의 전각이 있었으나 순조 이후 ‘양선당’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정조 때 왕대비인 정순왕후에게 존호와 책보를 올리는 의례를 행했는데 의례의 장소는 창경궁 명정전과 창덕궁의 경복전이었다. 이때 왕대비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의례의 동선이 영안전을 경유하여 양쪽의 궁을 오갔다(『정조실록』 7년 3월 18일), (『정조실록』 8년 9월 9일).

변천 및 현황

영안문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806년(순조 6)에 명정전에 물이 새는 일이 있어 수리를 하였는데 이때 영안문의 담장도 함께 수리했다는 기록이『승정원일기』에 한 번 나온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서도 영안문의 존재가 확인된다. 1900년대 초까지 줄곧 있었던 문인데,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비교해보면 영안문 일대 주변 전각들의 권역과 배치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1830년(순조 30)의 큰 화재 때 이 일대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지고 더 이상 복원되지 않아 지금은 없는 문이다.

형태

영안문은 1칸 규모의 담장솟을문으로 사주문(四柱門)의 형태이며, 기와로 맞배지붕을 이었고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