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빈궁(惠嬪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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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사망한 후 영조가 사도세자의 빈궁(嬪宮) 홍씨에게 혜(惠)이라는 휘호를 부여함으로써 빈궁 홍씨를 지칭하게 된 존칭 또는 혜빈홍씨의 거처.

개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관행을 이어받아 왕비, 세자빈, 후궁 등에게 모두 휘호가 있었다. 그런데 세자빈과 왕의 후궁 중 빈(嬪)의 경우 모두 빈으로 불리기에 여기에 휘호를 붙이면 세자빈과 왕의 후궁 사이에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예종 대부터 왕비, 세자빈, 후궁 등에게 휘호를 붙이는 관행이 사라졌지만 영조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빈 조씨에게 휘호를 부여하면서 그 관행이 다시 부활하였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 홍씨 역시 사도세자가 사망한 후 혜(惠)라는 휘호를 받고 혜빈궁(惠嬪宮) 또는 혜빈홍씨(惠嬪洪氏)로 불렸다.

위치 및 용도

혜빈궁은 사도세자의 빈궁인 홍씨를 지칭하던 존칭이었다. 즉 혜빈궁은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혜빈홍씨가 거처하는 건물이 곧 혜빈궁이었다. 1762년(영조 38) 윤5월 21일부터 혜빈으로 불린 홍씨는 1776년(정조 즉위) 정조 즉위 후 혜경궁(惠慶宮)으로 존숭될 때까지[『정조실록』 즉위 3월 10일 2번째기사], 15년 동안 혜빈궁으로 있었다. 그 15년 동안 혜빈홍씨는 여러 건물에서 생활하였는데, 주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거처하였다. 『동궐도(東闕圖)』에 의하면, 경춘전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변천 및 현황

조선시대 궁(宮)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국왕이 상주하는 거주지로서의 궁인데 경복궁, 창덕궁 등이 그런 예이다. 둘째는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 그리고 후궁 등에게 붙는 존칭으로서의 궁인데 동궁, 빈궁, 세손궁, 세손빈궁, 후궁 등이 그런 예이다. 세 번째는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후궁 등의 사당 명칭으로서의 궁인데 경모궁, 육상궁 등이 그런 예이다. 네 번째는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거처인 잠저의 명칭으로서의 궁인데, 어의궁 등이 그런 예이다.

이 중에서 혜빈궁은 혜(惠)와 빈궁(嬪宮)의 합성어로서 이때의 혜는 휘호이고, 빈궁은 세자빈의 존칭으로서의 궁이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관행을 이어받아 왕비, 세자빈, 후궁 등에게 모두 휘호가 있었다. 예컨대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가 정비(靜妃)로 불리고, 의경세자의 빈(嬪)이 수빈(粹賓)으로 불리며, 세종의 후궁 김씨가 신빈(愼嬪)으로 불린 것 등이 그런 예이다. 그런데 세자빈과 왕의 후궁 중 빈(嬪)의 경우 공히 빈으로 불리기에 여기에 휘호를 붙이면 세자빈과 왕의 후궁 사이에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예종대부터 왕비, 세자빈, 후궁 등에게 휘호를 붙이는 관행이 사라졌다.

하지만 영조대에 이르러 세자빈에게 휘호를 붙이는 관행이 다시 부활하였다. 그것은 효장세자 때문이었다. 1728년(영조 4)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7년째인 1735년(영조 11) 3월 16일에 영조는 세자빈 조씨에게 현(賢)이라는 휘호를 주었는데, 그 이유는 훗날의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가 1월 21일에 출생했기 때문이었다(『영조실록』 11년 3월 16일). 장차 원자가 세자가 되고 세자빈을 맞이할 경우, 세자빈 조씨와 혼동될 것을 우려한 영조가 미리 세자빈 조씨에게 휘호를 부여함으로써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세자빈이 세자보다 오래 살 경우에는 휘호를 주는 관행이 정착되었고, 사도세자의 빈인 홍씨 역시 사도세자의 사후에 혜(惠)라는 휘호를 받아 혜빈궁으로 불렸다(『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혜빈궁은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혜경(惠慶)이라는 휘호를 받아 혜경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혜빈궁이었을 때 홍씨는 주로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거처하였지만, 혜경궁이 된 후에는 주로 경복궁의 자경전(慈慶殿)에서 거처하였다.

형태

『동궐도』에 의하면 혜빈궁 홍씨가 오래도록 머물렀던 경춘전은 동향의 일자형 기와집 건물로서 정면 7칸 측면 3칸의 주 건물과 5칸의 부속건물 한 채로 구성되었다. 경춘전 동쪽으로는 숭문당과 환경전이 있어서 당시 경춘전이 창경궁의 핵심 내전이었음을 알려준다.

관련사건 및 일화

혜빈궁은 훗날 경춘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인수대비 한씨 역시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사도세자 생전에 혜빈궁 홍씨는 함께 오랜 시간을 세자와 함께 경춘전에서 보냈고 정조를 이곳에서 출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동궐도(東闕圖)』
  •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10.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등록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의궤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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