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廣城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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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강화도에 설치된 진보(鎭堡)의 하나로서 사적 227호.

개설

조선후기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해안 지역에 설치한 12곳의 진보 가운데 하나로서 1658년(효종 9) 최초로 설치하였다. 숙종대 초 강화도 해안에 48개소의 돈대(墩臺)가 건설되면서 그중 3개소의 돈대가 그 관할하에 들어오고 방어 군병이 편성되었다. 19세기 중반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과 미군의 최대 격전지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위치 및 용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화해협인 이른바 염하(鹽河)에서 가장 굴곡이 심하여 손돌목[孫乭項]이라 불리는 거센 급류가 흐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염하를 통과하는 선박들이 가장 위험을 느끼는 지역이기도 하여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광성보는 조선후기 국왕의 피난처로 사전에 정해졌던 강화 지역의 방어체제 강화를 위한 군사정책의 일환으로 1658년 강화유수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광성보의 방어 책임자로 별장(別將) 1인이 임명되었다. 1679년(숙종 5) 강화도 해안에 48곳의 돈대가 축조되면서 광성보 관할 아래 광성돈(廣城墩), 화도돈(花島墩), 오두돈(鰲頭墩) 등 세 곳의 돈대가 소속되었다. 이후 용두돈(龍頭墩)이 건설되어 광성보 관할로 들어왔다.

1745년(영조 21)에 강화도 해안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광성보에 성문을 만들었는데 그 문루를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광성보는 19세기 중반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되어 성첩과 문루가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후 강화해협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874년 여러 곳에 포대(砲臺)를 건설하였는데 그중 오두정 포대를 광성보에서 관할하였다.

1976년 광성보와 광성돈이, 이듬해에는 용두돈이 복원되었다. 2000년대 들어 오두돈이 복원되었고 가장 크게 파괴되었던 화두돈도 최근 복원되었다.

형태

돈대는 대체로 방형이나 원형으로 축조되는데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여 조총 등을 사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아래에는 불랑기(佛狼機) 등의 화포를 사격할 수 있는 포좌(砲座)가 3~4개소 있어 강화해협을 통해 접근하는 적의 선박을 인접 돈대와 함께 교차 사격할 수 있었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둘레가 100여 미터에 이르며 높이는 3미터 전후이다. 용두돈은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길게 쑥 내민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고 규모도 적어 포좌는 설치되지 않았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66년(고종 3) 대동강을 거슬러온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군민의 공격으로 격침된 사건에 대한 보복과 조선에 대한 통상을 강요할 목적으로 1871년(고종 8) 6월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초지진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한 미 해병대는 이후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6월 11일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영 중군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 1천여 명이 수비에 임하였으나 미군함의 함포 사격의 지원을 받은 미 해병대의 공격에 모든 돈대가 함락되고 어재연 이하 350명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미군은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가벼운 손실을 입는 데 그쳤다. 이 전투로 광성보 일대 방어 시설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7일).

참고문헌

  • 『강도지(江都誌)』
  • 『해동지도(海東地圖)』
  • 『강도부지(江都府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식암유고(息庵遺稿)』
  • 서인한, 『병인·신미양요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9.
  •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13, 2002.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강화도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돈대편)』, 1999.
  • 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강도의 진보설치와 관방체계의 확립」, 『인천학연구』9, 2008.

관계망